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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r 07. 2024

프롤로그

-나는 꼬꾸라졌다

50을 바라보던 40대 후반 시절. 

나는 <나는 꼬꾸라졌다!>라는 제목의 책을 구상했다. 

실제 100살을 살지는 않겠지만 자꾸 수명이 늘어난다니 

넉넉히 살날을 잡는다면 50은 100을 반절로 접은 모양새다. 

반으로 접으면 어떻게 될까?

몸을 반으로 접어보라. 

고개가 푹 아래로 숙여지는 것이 어딘지 불편하고

어찔한 기운까지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 이거야’

나의 50은 이런 꼬꾸라진 모양새겠구나 했다. 

실제 그 시기 나의 상황도 상상처럼 그랬다. 

하던 일은 점점 줄어들고

흰머리는 염색하고 한 달을 넘기기 힘들게 자라났으며

팔자 주름이 패인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아주 어릴 적 보았던 ET의 팔자주름이 떠올랐다. 


'와, 이대로는 못 살겠는데' 하며 화장품을 바꾸고

피부과를 전전해도 나는 이미 늙어있었다.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꼬꾸라졌다고 선언하고 늙음을, 물러난 뒷자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도 ‘허세’라는 걸 알았다. 

톡톡 튀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야지 했는데도 

때때로 무척이나 우울했다. 

‘우울’과 ‘자괴감’이 세트로 따라왔다. 

그런데 그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사람은 그렇다. 자꾸 경험하면 

‘아, 이런 거구나.’ ‘이런 거였지’ 하게 된다. 

우울과 자괴감도 그랬다.

그리고 부모님을 통해 노화가 계단을 오르듯이 한순간에 진행되는 것을 보며

지금 나의 늙음은 애송이일 뿐이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힘이 남았을 때 늙음을, 죽음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생’이 한순간이듯이 ‘죽음’도 한순간일 뿐이었다. 

그 한순간을 너무 허망하게 보내고 싶지 않다면 늙음도 죽음도 공부가 필요하다. 

난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같이 배워보자.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삶을 배우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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