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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Mar 28. 2024

셋이 모여야 하나

퀴즈는 이제 그만~

친구를 만나는 일은 나이 든 후, 내 최고의 취미이자 즐거움이다. 나는 친구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젊을 때도 기껏 약속을 정해놓고, 그날이 되면 나가기 싫었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도 혹시 상대가 만나자고 할 거 같으면 미리 일이 있는 듯 분위기를 바꿨다. 결혼해서는 낮에 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저녁밥 하기도 힘들 만큼 지쳤다. 요즘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I’가 하는 짓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가 친구를 만나는 거다. 사람 만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과거가 있으니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의 수가 많지는 않다. 다만 내 친구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뿐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니 귀찮음은 줄고, 즐거울 수밖에 없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소중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또래와 어울리는 것은 맘 편하고, 즐겁다. 같은 시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은 일일이 설명하기 힘든 공감대가 있다. 20대에는 남자친구와 연애 이야기를 하고, 30대에는 결혼 생활과 아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40대에는 아이 입시와 집 이야기를 하고, 50대에 이르러서는 연로한 부모님 걱정과 갱년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같은 고민을 안고, 같은 문제를 해결해 내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몸도 마음도 늙어갔다. 어느 날부터 아픈 몸 이야기가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번호표를 뽑아야 할 정도로 자기 몸 아픈 이야기를 했다. 척하면 척이고, 착하면 착이었다.

관절에는 글루코사민이라더니 요즘에는 콘드로이친을 추천한다. 콘드로이친 중에서도 상어연골과 소연골이 있다는 전문가 수준의 설명까지 이어가며 서로의 건강을 챙긴다.

어깨가 아파서 수 십만 원 들여 통증 주사를 맞았는데 아무래도 보험 처리되는 몇 천 원짜리 침을 자주 맞는 게 낫다는 설명도 오간다.

우리는 모두 지병처럼 아픈 곳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픈 몸은 그런대로 괜찮다. 현대 의학이 있으니 침으로 약으로 아직은 다스릴 수 있다. 문제는 잃어가는 기억력과 반짝이던 총기다. 이건 약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나 얼마 전에 걔 만났잖아. 중학교 동창.”

“누구?”

“왜 너랑 2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걔가 1학기 부반장이었나 그랬지. "

“나랑 같은 반에 부반장? 아, 그 얼굴 하얗고, 눈 작았던 얘?”

“아, 맞아. 걔 이름이 뭐였더라?”

“글쎄 뭐였지? 뭔 숙이었던 같은데.”

“현숙이?”

“현숙이는 내 짝꿍이었고.”

“아, 맞다. 그럼 영숙이었나?”

“그런 흔한 이름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던진 한 친구의 질문에 우리는 모두 답답증이 몰려온다. 얼굴도 떠오르고, 이름의 끝 글자까지 알아냈지만 도저히 나머지 한 글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퀴즈를 풀어봐도 답을 모를 때는 어쩔 수가 없다. ‘유퀴즈’에서 백만 원을 걸고 내는 퀴즈도 문제를 듣고 단번에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좀처럼 답을 맞힐 수 없다. 우리는 스무고개를 하듯이 답을 찾아 퀴즈를 이어갔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왜 그런 줄 모르겠지만 사소한 것인데도 떠오르지 않으면 무척 답답하다. 이런 사소한 걸 모른다니 싶어서 그런 걸까?     




“너 이거 할 줄 알아?”

친구가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며 묻는다. 한 사이트에 욱하는 심정에 댓글을 달았는데 아무래도 지워야겠다는 거다. 우리는 웬만해서는 댓글을 달지 않는 무리였다. 친구들도 나도 소심하니 비슷했다. 뭔가를 주장하고 나면 뭐 강하게 주장한 것도 아닌데 내내 찜찜했다. 우리는 힘을 모아 댓글 지우기에 나서는데 도무지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거 수정할 수 있을 텐데.”

“그래, 당사자만 수정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거야.”

우리는 머릴 맞대고 방법을 찾는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화면 한쪽에 있는 세 개의 점이 있는 부위를 누르자 댓글을 수정 및 삭제하는 기능이 뜬다.

“와, 간단한 거였는데 이걸 몰랐네.”

답답해하던 친구는 환한 얼굴이 되어 자신의 댓글을 지우고, 친구가 속 시원해하니 덩달아 안심이 된다.


하지만 잠시 후 현타가 온다.

“야, 이제 우리는 한 사람 몫을 못 하게 된 거 같아. 아무래도 셋은 모여야 한 사람 몫을 하려나 봐.”

한 친구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많아져 퀴즈를 풀곤 했다. 대화의 반이 퀴즈일 때도 있었다. 대화를 하는 건지 서로 퀴즈를 내고 맞추는 놀이를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퀴즈를 풀다 보면 결국 답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적어도 셋은 되어야 가능했던 거 같다. 그러니 친구의 ‘이제 우리 같은 사람 셋은 모여야 보통의 한 사람 몫을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 말도 많고, 새로운 기계나 사이트를 이용하려면 이래저래 주변 도움을 받곤 한다.

처음 키오스크가 등장했을 때가 생각난다. 햄버거 가게에 등장한 키오스크 때문에 햄버거 세트를 사서 먹은 적이 있다. 햄버거에 커피를 먹고 싶었으나 키오스크 첫 화면에는 세트만 있어서 커피를 찾아 주문하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다. 키오스크로 아이스크림을 살 때는 잔뜩 긴장했다. 키오스크 앞에서 버벅대지 않고 주문해야 내 뒤에 줄 선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한 통에 네 가지 맛을 고를 수 있었는데 네 가지 맛을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아서 더 힘이 들었다.




사람의 뇌는 시간이 지날수록 퇴화하게 마련이다. 사람이 늙으니 뇌도 늙는 것이다.

뇌가 늙는 것을 사람들은 머리가 굳는다고 말하는데 이건 과학적으로도 정확한 표현이다.  뇌는 노화되면서 플라스틱성이 감소한다고 한다. 플라스틱성의 감소는 쉽게 말하면 뇌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을 뜻한다. 유연성이 떨어지니 흔히 말하는 뇌가 굳는다는 표현이 제대로인 것이다.

노화로 뇌에 뉴런의 수가 준다는 것은 흔히 아는 사실인데 수만 줄어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뇌가 굳으면서 뉴런이 다양하게 연결되는 기능도 떨어진다. 젊을 때는 하나를 통해 다양한 생각이 펼쳐져 아이디어가 샘솟았다면 늙으면 그게 잘 안 되는 거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니 예전 생각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누를 범하기도 한다. ‘꼰데라는 것은 머리에 들어오는 것은 없고, 머리에 있는 것을 내놓기만 하는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늙어갈수록 머리가 굳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것이 굳어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여, 자기 생각만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

예전에 독서 모임에서 만난 한 친구는 아들과 약속 하나를 했다고 했다.

“엄마가 60 넘으면 꼭 네가 하는 말 듣고 살게.”

그 친구의 약속은 나름 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어 자기 고집에 쌓여 생각의 벽을 쌓고 살아서는 좋은 삶을 살 수 없다. 키오스크 앞에서 먹기 싫은 음식을 주문해서 먹어야 하는 것처럼 원활하게 살 수 없으며, 셋이 모여야 그나마 한 사람 몫을 하게 될 정도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하지만 실망할 일만은 아니다. 뇌 노화를 늦추는 방법을 챗GPT에게 물으니 좋은 방법을 알려주었다.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은 노화를 늦추는 좋은 방법이에요. 새로운 음식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가는 것 등이 좋은 영향을 주지요. 산책을 하는 것도 뇌 노화를 늦추는 방법이 될 수 있답니다.”      

늙어가는 지금, 우리는 ‘I’를 버리고 ‘E’처럼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여전히 'E'가 벅찬 나는, 나의 1/3 친구들을 더 사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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