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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 Apr 11. 2024

외계인의 신호! 이명 아니고?

 감각의 노화

 

귀에서 쉬지 않고 소리가 난다.

찌잉, 찌이잉~

외계인이 내게 알아들으라고

제발 좀 알아듣고 반응하라고

쉬지 않고 신호를 보낸다.

미안하다, 내겐 그냥 이명일뿐이다.

그러니 제발 그만 울려라.

속 울렁인다.

갱년기 나이 든 여인에게

지구를, 우주를 구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다. 정말!     




젊은 시절 난 주구장창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그래서 친구들은 음악을 골라 녹음한 테이프를 선물로 주곤 했다. 난 음악만 있다면 어느 공간에서도 나 혼자 있는 듯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음악이 세상 속 나를 보호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너무 많이 들은 걸까? 언젠가부터 시끄러운 소리를 많이 들으면 피곤해졌다. 엄마를 모시고 차 타고 갈 때는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소리에 귀가 아파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도 나이를 먹고 나니 비슷해졌다. 소리로도 내가 피곤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어느 날부터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나에게만 들리기 시작했다. 젊은 날 내가 꿈꾸던, 세상과 나를 떼어놓고 싶어 했던 순간이 ‘이명’으로 온 것이다.

세상과 나를 구분하는 이명은 정확하게 말하면 청신경의 노화와 손상으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다. 오랜 시간 활동했던 청신경 세포는 기능이 떨어지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래서 이명을 듣고, 더 심하면 소리를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거다.


소리 듣는 능력이 떨어지면 자기 말소리도 잘 안 들리게 마련이다. 그러니 노인들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커진다. 젊은이들은 그것이 화를 내는 것만 같아서 상대하기 불편해진다. 우리 아빠도 이런 말을 늘 하곤 하셨다. 난 그냥 하는 말인데 화를 내냐고. 난 아빠가 이유 없이 화를 내서 같이 화가 났던 건데 아니었던 거다.

이명에 내가 외계인을 오해하듯이, 청신경의 노화에 내가 아빠를, 목소리 큰 노인을 오해했던 셈이다.      




감각기관의 노화는 귀에 한정되지 않는다. 눈도 그리 늦지 않게 노화를 드러낸다. 40대에 이르러 많은 사람이 노안을 겪는다.

언젠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내게 우유병을 들이밀었다.

“이거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인지 좀 봐줄래요?”

“아, 예.”

훤히 보이는 글자를 봐달라니, 당시에는 조금 의아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노안은 수시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친한 언니와 식당에 갔을 때의 일이다. 작은 글자가 가득한 메뉴판이 나오자 언니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나 먹고 싶은 거 골라서 시키란다. 나를 위한 배려도 있었지만, 언니는 깜빡하고 돋보기를 들고 나오지 않아서 볼 방법이 없었던 거다. 노안은 눈을 뜨고도 뜨고 있는 거 같지 않은 상태로 몰아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눈에 나타나는 변화는 노안뿐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바람에도 눈이 시리고, 눈곱도 더 잘 낀다. 젊을 때는 예뻐 보이고 싶어서 거울을 찾았다면, 이제는 눈곱으로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거울을 자주 봐야 한다.

내가 남편에게 요즘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는 ‘눈곱 있네, 닦아’다. 젊은 날 난 남편의 눈곱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요즘에는 너무 자주 본다. 그래서 출근할 때면 당부를 하곤 한다.

‘회사에서도 거울 자주 보며 확인해. 혹시라도 눈곱 끼고 직원들 만나면 안 되니까.’

남편은 구구한 내 잔소리를 듣는 것이 불편하겠지만, 남편의 눈곱을 다른 사람이 본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창피하다.


하지만 이건 창피한 마음만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노화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이다. 노화는 어디만 빼고 일어나지 않는다. 말랑하여 유연하게 상을 잡았던 수정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간다. 그래서 가까이에서 있는 물체의 상을 잘 못 잡게 된다. 이것이 노안이다. 그리고 눈은 노화로 막이 탁해지는 등 다양한 원인으로 시력을 떨어뜨려 점점 가깝든 멀든 잘 안 보이게 된다.


눈물샘에도 변화가 생긴다. 노화로 물기와 윤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눈물샘에도 마찬가지다. 눈물의 양이 줄면서 눈은 건조해진다. 그러다 보니 눈곱이 많아진다. 눈물이 알맞게 흐를 때는 눈도 보호되고, 눈 시림과 눈곱 끼는 것도 막을 수 있는데 눈물이 줄면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는 거다. 이럴 때 의사들은 말한다.

 ‘인공 눈물을 쓰세요.’

    



마지막으로 미각은 어떨까? 미각 신경도 나이가 들수록 망가지고 죽는다. 자연히 맛을 느끼는 감각이 덜해져 요리 실력까지 줄어든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준 음식이 갈수록 맛이 없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의 요리 중 특히 싫었던 건 가지요리였다. 가지를 쪄서 간장 양념장을 올린 것이었는데 먹고 싶은 맘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가지 요리는 할머니 전용 반찬이 되곤 했었다. 할머니는 부드러워 쉽게 씹어 삼킬 수 있고, 소화 잘되는 음식을 선호했던 거다. 노화가 가져온 자연스런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점점 나도 할머니처럼 먹고, 엄마처럼 먹게 된다. 어릴 적 먹었던 음식이기 때문에? 유전으로 결국 같은 입맛이 되기 때문에?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노화로 인한 변화가 결국 비슷한 선택을 하게 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입맛이 달라진다. 매운 음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나다. 누구보다 잘 먹는다는 ‘맵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매운 음식을 먹으면 저녁 내내 불편하다. 매운 고춧가루가 장을 휘집고 다니는 것이 그림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자극을 견뎌낼 건강함이 노화로 사라진 것이다.


젊은 날 지하철에서 한 할머니가 하신 말씀은 인상적이었다.

‘맛있을 때 많이 먹어. 나이 들면 먹고 싶은 것이 없어져.’

늘 다이어트에 목매던 내게 그 말은 이상하고 신기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말을 알 것 같다. 먹는 기쁨이 예전만 못할 뿐 아니라 먹고 싶다고 노래 하던 음식도 막상 먹으려면 많이 먹지 못하고 만다.

맘 같지 않은 식성이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난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그게 사라진다는 건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어느날, 떠나가는 커피를 붙잡는 글을 쓰기도 했다.   



 

커피는 나의 소울 푸드를 넘어 소울 메이트였다.

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할 정도로 아침에 일어나 커피 마시는 걸 좋아했다. 그 시간이 나의 행복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커피 한잔을 채 마시지 못했다. 정성껏 내려 한 모금하면 ‘아, 살 거 같아’라는 탄성이 나오곤 했는데 그저 그랬다. 새벽녘이면 수시로 잠이 깨고, 그러면 일어나서 커피나 마시자 하며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그게 사라지니 일어나도 별 의미가 없는 것도 같고 좀 그렇게 되었다.


커피는 언제나 나의 만병통치약이었다. 힘이 들고, 맘이 답답해지고, 긴장이 될 때면 커피는 나를 위로해 주고,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또 커피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책과도 참 잘 어울렸다. 음악을 듣는, 책을 읽는 맛을 커피가 살려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커피 생각이 줄어들면서 그 재미도 줄었다. 최근 몸 상태가 별로라 커피를 멀리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몸이 자기 상태를 알고 절로 내리는 명령 말이다. 하지만 아직 내 맘은 커피를 보내고 싶지 않다. 내 삶의 작지만 분명한 위로였던 커피를 나는 너무 사랑했고, 그 감정은 아직 생생하다.

난 그 기억만으로도 다시 커피를 내리고, 입가에 가져가 홀짝여볼 생각이다. 커피여, 제발 떠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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