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감자 200 그램 /박상순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옆으로 옮깁니다.
슬픔 감자 200그램을 신발장 앞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다음날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거울 앞으로 옮깁니다.
슬픔 감자 200그램을 옷장에 숨깁니다.
어젯밤엔
슬픔 감자 200그램을 침대 밑에 넣어두었습니다.
오늘 밤엔
슬픔 감자 200그램을 의자 밑에 숨깁니다.
슬픔 감자 200그램은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딱딱하게 슬픕니다.
슬픔 감자 200그램은 알알이 슬픕니다.
슬픔 감자 200그램은.
시 분석)
매일 만나는 식재료 감자에게서 이와 같은 시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슬픈'이라는 형용사를 모든 '감자'의 앞에 배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다. 슬픈 감자라고 단정 지어버리니 오히려 슬픔이 구질구질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삶에서 슬픔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출몰하는가. 그때마다 처절하게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위로가 은근히 전해지는 기분이다.
감정을 감자처럼 이리저리 옮길 수 있다는 상상만 해보아도 즐겁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가시화하고 심지어 무게를 설정해 손에 쥐어지는 느낌이라니.
게다가 감자의 무게는 불변이다. 체감하는 슬픔이 아무리 엄청나게 무거운 것이어도 이 시에서처럼 그 무게는 고작 200그램이라고 생각을 하면 해학적으로 혹은 덤덤하게 슬픔을 승화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이 슬픈 감자의 무게를 200그램으로 가볍게 설정해 준 것이 고맙기까지 하다.
시인은 딱히 어떻게 슬픔을 견디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다만 그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음을 은근히 알려주며 명사 '슬픔'과 형용사 '슬픈'을 섞어서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슬픈' 감자는 정말로 감자가 울고 있는 것같이 이미지가 그려지는데 '슬픔' 감자는 슬픈 감정이 감자라는 결정체로 굳어져 스스로 고독을 누릴 줄 아는 독립적인 객체가 된 듯한 인상이다.
시의 배치를 보면 1연에서는 슬픈 또는 슬픔 감자를 집의 여기저기로 장소를 이동시키는 동작을 묘사하고, 2연에서는 어둡거나 폐쇄된 공간 또는 안전한 공간에 정착시키는 모습니다. 3연에서는 슬픔감자는 본질적으로 그 속성에 맞게 슬프며 형태상으로 '딱딱하게' 슬퍼하며 한 알 한 알이 개별적으로 각자 '알알이' 슬프다.
이와 같은 시의 흐름은 마치 우리 인간이 슬픈 상황에 대응하는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혹은 내면에서 비롯된 슬픈 감정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여기저기 옮겨 가며 호소하거나 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스스로 자기만의 지점에 안착하여 슬픔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줄 알게 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최초의 슬픔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기 다 자기만의 강도로 여전히 슬프며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슬픔은 불가피하다는 것으로 읽힌다.
하지만 다만 그렇게 읽힐 뿐 시적 화자는 별다른 말이 없다.
그래서 이 시가 어렵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정답이 없는 시험문제가 주는 짜릿한 스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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