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21]
한국 사람에겐 취약한 두 가지가 있어요. ‘질병’ ‘수치’입니다. 질병에
관한 한 우리처럼 박식한 민족은 없다 할 정도로 온갖 정보를 꿰차고
어떤 증상이 나타나면 지레짐작으로 밤잠을 설치죠.
수치에도 민감합니다. 언젠가부터 계량화된 수치를 맹신하고 부르르
몸부터 떠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OECD 국가에 가입한 후 OECD가
내놓는 각종의 평가 수치를 접하면서 심해진 현상입니다.
OECD 국가의 자살률, 행복지수, 이혼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사 평가한
수치를 보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국민이 분명합니다. 평가항목마다
대한민국의 수치는 대부분 부정 순위 상위에 오르니까요.
행복이란 정의도 제대로 내리지 못한 채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가?”
“내 노년 준비 상태가 빈 하다”와 같은 자신의 취약한 점을 파고들어
스스로 조급증을 유발합니다.
각종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면 ‘준비된 사람’. 소비시장을
흔드는 광고 유혹까지 조급증을 부추깁니다. 덩달아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행복 담론이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대세가 됐습니다.
행복은 마치 여유로운 노년 준비가 다인 것처럼 또박또박 적금을 부어야
하고 상해, 질병 등 생명보험은 필수로 들어야 하며, 여기에 만 보는 기본,
땀 흘려 운동하고 상조회 가입까지 갈수록 항목이 추가되죠.
이로 인해 부담해야 할 비용은 점점 늘어날 밖에요. 혼수 준비처럼 남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은퇴란 문제와 마주칩니다. 은퇴는 평생의 노동과 헌신을
내려놓고 편안해지는 시기여야 하는데, 늙고 병들어 지낼 불안한
미래로 엄습해 옵니다.
불분명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오늘의 많은 것을 눈 감는 것이 현명한
자세라 할 수 있을까? 자칫 내일의 불안을 이겨내려다 현재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가치전도가 생기는 건 아닐까? 우리의 삶의 현장은
‘지금 여기’인데 말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할 곳도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의 놀라운 기쁨이나 꿈을
좇지 못하고 오지 않은 ‘거기, 미래’ 에다 내 삶을 신탁해야 한다면
‘지금, 여기’는 희생을 감내하는 소모적 현장이 될 수밖에요.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자기기만 속에서 자유롭지 않은 오늘을
살고 뒤늦게 원했던 행복 요소를 갖췄다고 한다면 과연 “그래 이거야.
바로 내가 꿈꾼 것.” 감탄할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내 젊은 날을 날려버렸다는 연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행복은 조화(造花)
처럼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건을 갖추지 못했어도,
작은 것에 눈 뜨고 소소한 일상을 기쁘게 살면서 만나는 것이
행복이란 생화(生花)입니다.
현실의 욕망에 가급적 순응하면서 ‘지금 여기’부터 살뜰하게 사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는 불분명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오늘을 즐기고
내일을 꿈꾸자고 했습니다.
여기저기 아픈 것은 나이가 들며 생기는 일상이려니, 만성질병 한둘은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입니다. 예술가 중 많은 이가 자신이 앓았던
질병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작품을 통해 드러냈듯이,
질병도 나의 반려입니다.
50대에 귀에 이명(耳鳴)이 생기고 눈엔 비문증(飛紋症)이 찾아왔지요.
귀에서 풀벌레가 쉬지 않고 울어대는 이명도 큰 소음입니다. 심한 경우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통스럽죠.
비문증은 눈앞에 모기가 나는 듯한 현상입니다. 난독으로 나타난 증상
인데 맑게 닦인 거울을 보면 내 눈도 저렇게 깨끗한 시절이 있었지, 위로
합니다. 눈을 꼭 감았다 떠보지만 없어지기는커녕 신경만 더 쓰입니다.
언젠가 황동규 시인이 쓴 ‘비문’을 읽고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시인 역시
비문증을 호소하다가 “모기가 좀 날면 어때?”하는 생각이 들면서
‘날건 말건’ 이란 시어로 ‘비문(飛紋)’을 썼습니다.
...... 늦가을 저녁/ 나무, 꽃, 나비, 새들이 녹는 빛 속에/
벌레 하나 눈 속에서/
녹지 않고 날고 있다/ 고개를 딴 데 돌려도 날고 있다/
눈을 한참 꾹 감았다 뜬다/ 눈물이 고일만큼/
눈물에도 녹지 않고 날고 있다/ 날건 말건!
여기서 ‘날건 말건’은 자신의 눈에 비문이 보일 때 타이르는 주문입니다.
나도 증세를 느낄 때면 똑같은 주문을 외웁니다. 이명에 신경이 쓰일
때는 ‘울건 말건’이란 주문을 사용합니다. 이명, 비문증 다 노화와
관련된 질병으로 낫진 않아도 자각증은 낮아졌지요.
인생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환경이라면 타박할 것이 아니라
아니라 증세에 익숙해지는 게 최선입니다.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행복을
부르는 마법의 주문하나 있으면 더 좋겠죠. 아브라 카다브라!
글 이관순 소설가/ ks81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