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 2020 09 09
시인 허만하는 풍경의 시인입니다. 10여 년 전 만났을 때 불편한 몸을
단장에 의지하고 있었어요. 그가 즐겨 쓰는 풍경이란 詩語는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낯설음이라기보다, 자신을 알아주는 생명과의 교감이며
숨죽이고 있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풍경을 우연이라 말하지 않고 인연으로 설명합니다. 그러한
고유의 풍경과 만나는 과정은 바로 우리의 일생과 닮았어요. 우리는 늘
길 위에 서야 하니까요.
2017년 여름, ‘길이 끝나는 데서 산이 시작된다’ 는 책을 끼고 지리산에
올랐습니다. 정기를 받아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다면, 주어진
3박4일 동안 새로운 경이를 느끼고 싶었어요.
친구들과 어울려 좋은 공기마시고, 건강을 도모하려는 것이 산에 가는
사람들의 생각이겠지요. 그런 내가 지리산에서 미처 몰랐던 경이에
눈 뜬 것은 나도 하나의 풍경이라는 자각이 들면서였어요.
어느 순간부터 도시의 때 묻은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지리산의 작은
쪽 자락을 구성하는 자연이자 풍경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부끄러워지는 건 내 자신입니다.
어떻게든 1915m 천왕봉을 밟고 무사히 마지막 대피소 치밭에 안착할까만
생각한 그 경박함이 싫어서였어요. 살면서 축복된 일은 좋은 만남입니다.
내게 그 여름 지리산은 2017년을 빛낸 가장 고귀한 만남이었어요.
가파른 정상을 엎드려 오르는 것은 인간이 취할 가장 겸손한 자세임을,
얼음처럼 서늘하고 눈부신 흰 구름이 맑고 깨끗한 영혼의 자락임을,
뜨거운 호흡을 달고 경사 진 비탈을 오를 때, 실핏줄마저 드러낼 투명한
햇살에 두 손을 담글 때, 보이고 들리는 것은 천상의 속삭임입니다.
그때마다 손을 뻗어 푸른 하늘을 움켜잡지만 파랑은 빠져나가고,
작렬하는 태양의 열사태는 머리위로 쏟아지고, 한 여름 초록가지를 흔들고
사라지는 바람은 한줌 풍화도 없어 보였어요.
웅위한 바위들은 만년 수수깨끼를 품고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있고,
물결치는 푸른 산맥들은 저마다의 소리로 천년 바람을 노래합니다.
.
그 전설의 풍경을 보고 듣다가 진실로 경이와 맞닥뜨린 것은, 천왕봉과
마주 선 산등성에서 만난 고사목 군(群)입니다. 마른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맨몸 맨가지로 매서운 삭풍한설과 이 풍진 여름을 보내는 고사목들입니다.
오늘도 어둠을 헤치는 아침노을과 저무는 저녁노을 사이로 타올랐을
고사목이여. 그 앞에서 가슴 속 언어가 꿈틀댑니다.
그 먼 시원을 달려와 이곳에 씨를 뿌린 이래로, 한 발짝의 움직임 없이
모진 추위와 타는 여름을 견디며 일생을 보냈을 저 경건과 신독(愼獨)은
또 얼마나 살 떨리는 광휘인가.
몸의 거죽을 다 벗어주고도 그 자리에 앙 붙어 결기를 잃지 않는 나무.
그것은 몸이 죽어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 자기의 자리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리를 알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아름다움입니다. 나무는
아는데 영민한 사람만 외면합니다. 제자리를 찾지 못했거나, 아예 모르거나,
알고도 버린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사람이 자기 설 자리를 잃을 때,
세상은 소란해집니다.
대원계곡에서는 소(沼)가 몇인지, 하늘빛인지 물빛인지 따지지 말라합니다.
돌 하나 얹어 놓는 뭇사람의 소원마저 자연이 되는 이곳에선 세상의 셈법은
부질없는 것. 그저 나를 놓아버리고 자연이 되면 될 일입니다.
고사목을 보다가 ‘살아 1000년 죽어 1000년’을 지내는 주목이 생각나고,
대관령의 황태가 떠오릅니다. 눈보라를 맞으며 밤에는 얼었다가 낮에는
녹아내리기를 넉 달간 이어가야 한다는 그.
내장이 뽑힌 채 매달려서 그 역경을 헤쳐가야 거듭나는 황태. 그 아픔을
고사목이 모를 이 없겠지요. 흔들어보지만 아직도 꿋꿋한 나무는 죽어도
죽지 않은 생명의 경이를 부릅니다.
가치가 있는 것은 어디에 있어도 시간의 풍화를 이겨냅니다. 사막을 가는
낙타가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 것처럼. 바다는 물을 가리지 않고, 산은
바람을 탓하지 않고 받아들이죠. 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잘 죽어야 잘 사는 것임을 깨치어 주는 고사목. 이를 뒤로 하고 천왕봉을
향하다 다시 뒤돌아서서 눈길을 줍니다.
“잘 견디게. 오래오래 가슴으로 기억하리. 아름다운 지리산 풍경으로.”
(글 이관순 소설가/daumcafe/leeletter) 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