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0-26]
우리 밥 한번 먹어요.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어요.” 이처럼 살가운 말이 있을까. 아부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침과 모자람도 없는, 정감을 주는 이만한 표현도 없습니다.
말하고 듣는 사람 다 기분 좋게 하니 참 좋아요.
먹는 것에 허기진 보릿고개 시절도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먹는 일은
귀하고 소중합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어라.” (고은 시)
친구든 남녀든 사람끼리 마주 앉아 밥 먹는 것만큼 일상사가 어디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들과 한 끼를 같이 하는 일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생들이
정분과 위로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 짧은 순간이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고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순댓국 그릇 사이에 깍두기 한 접시 놓고 웃음
짓는 사이, 따뜻한 마음과 행복이 익어갑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친구의 청을 사양한 적 없나요? 내가 후회하는 게 그런
것들입니다. 이번 일만 마치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사는 게 늘 그렇지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또 일이 터지고, 출장 가고,
그러다 1년이 후딱 지나고 맙니다.
나이 들며 그런 기억이 안쓰럽습니다. “승진만 하면, 적금 붓는 것 끝내면”
이란 가정법에 스스로 주술을 걸다가 해가 꼴깍 넘어가고
어느새 새 달력을 거는 것이 우리가 사는 모습입니다.
KBS 1TV ‘개그콘서트’에 ‘밥 묵자’ 코너가 있었지요. 권위적인
가장이 가족들의 공격을 받을 때면 “자, 우리 밥 묵자”로 분위기 반전을 꾀합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까지 있으니까 마음이 좀 상했어도
밥상 앞에서는 일단 감정부터 추스르지요.
대화 없이 숟가락 소리만 달그락거릴 땐 식후 분위기가 점쳐집니다.
그래도 칭찬만은 밥상머리가 제격이지요. “여보. 야가 이번 시험서 평균
10점이나 올랐대요.” “정말? 그래 잘했다. 우리 외식하자 주말에.”
독신으로 사는 여자의 말입니다. 사람들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지만,
대부분 끝머리에 “우리 얼굴 보고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빼먹지 않습니다.
곤혹스러운 것은 다른 직장처럼 밥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운 데 있죠.
자칭 ‘막일’이라는 무대 일을 하다 보면 삼시세끼 제때 찾기가 어렵습니다.
낮에 잠자고 남잘 때 일어나 일하는 뒤바뀐 생활이 많다 보니까요. 성격이
불같은 친구가 아침부터 전화했습니다.
“야, 밥 한번 먹자는 데 그리 힘드냐? 세상일 혼자 해?” 어젯밤 약속에
빠졌다고 십자포화를 맞습니다. 가까스로 전화를 끝내자 “밥은 먹고 있냐?”
엄마가 들렀다가 텅 빈 냉장고 문짝에 붙인 메모 글이 눈에 띕니다.
가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잘 먹어요. 다 먹고살자는 거 나도 알아요.”
그렇게 대꾸합니다. 어찌 됐던 먹자고 일하든, 일하려고 먹든 밥은
참 중요합니다.
대학생 때 교수님이 설렁탕 한 그릇을 사주셨지요. 감사한 마음으로
국물까지 싹 비웠는데 다음 날 연락이 옵니다.
“설렁탕 맛있었냐?” “네 교수님. 다음에도 그런 기회를 종종.”
이틀 후 똑같은 말을 들을 때도 유머가 많으신 분이라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나만 보면 그 얘기를 꺼냅니다.
“그 집 깍두기 맛있었지?” “내가 사준 설렁탕 안 잊었지?”
“야 이것 좀 해. 설렁탕 값은 해야지.” 나중엔 토하고 싶을 정도로
후회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돌이켜 보면 학창의 추억 하나를 내게 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오늘 그 교수님께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밥 한번’이 인연이 돼 차진 관계로
발전했지요. 그러면서 깨닫습니다. 살면서 놓치면 안 될 것이 타이밍임을.
팀 페리스가 쓴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에는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한 줄로 세워 처리함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건강, 부모님, 가족, 사람 관계 같은 소중한 것은 하나씩 순차방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병렬로 함께 해내는 것이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삶은 단발로가 아닌 동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열심히 꿈을 좇아 일하면서
틈틈이 가족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시간 내 운동하고, 소중한 사람들의
안부를 챙기는 일들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핑계가 참 많습니다.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미루며 사양하죠.
훗날 뒤돌아보면 다 실수한 것입니다. 사람들과 부지런히 만나고 한 끼 밥을
나누세요. 그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보약입니다.
살아온 세월에서 이런 메시지를 깨칩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시간” 이란 것을. 그래서 시간은 쪼개고 쪼개도 또
쪼개지는, 퍼내도 줄지 않는 샘물 같은 것임을.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