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사의 풍경

이관순의 손편지[23]

by 이관순

겨울 산사의 풍경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인 어린 날의 아침 풍경.

시골집 마당 한쪽의 장독대가 떠오릅니다. 흰 털모자를 눌러쓴

항아리와 독들이 침묵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곱습니다.


초등학교 조회시간 모양 작은 항아리는 앞줄에, 중간 크기는 가운데,

큰독은 맨 뒷줄에 다소곳이 서 있습니다. 마치 가족사진을 찍으려고

3대가 어깨를 정겹게 대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떠난 것은 다 그립습니다. 소꿉동무의 코 흘린 얼굴, 동구 밖 느티나무,

엄마 땀 냄새, 도랑의 송사리 떼... 그립긴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죠.

납북된 남편, 집 나간 자식, ‘안동역 앞에서’ 그 사람….


만해 한용운은 그리움을 다 ‘님’이라 불렀지요. 그 대상이 넓고 커서 하나님,

부모님, 사랑하는 사람, 친구, 고향까지 다 ‘님’으로 품었습니다.

떠난 것과 기다림의 모든 것들까지.


소나무 사진가로 유명한 배병우의 작품에 ‘만나고 헤어지고’라는 제목의

소나무 사진이 있습니다. 가수 앨튼 존이 한눈에 반해 샀다는,

경주 남산의 소나무를 깊은 시정으로 포착한 사진입니다.

솔은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면서 다시 숲을 얘기합니다.

우리를 넘나들다 나와 너로 헤어질 때처럼, 우리 또 어디서 무엇이 돼
만날까. 그 말에 생의 비원(悲願)까지 담아 보여 눈물겹기도 합니다.

학창 시절 그룹 활동을 한 여자 친구들과 만났습니다. 모두들

어쩌다 여기까지 왔니? 세월무상에는 이의가 없더군요.

아등바등 애들 키우고 시어른 눈치 보며 남편 뒷바라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게 뭐야? 난 뭐지?’ ‘ㅠㅠ…’

그마저 철 지난 이야기라며 헛헛한 웃음을 날립니다.


빈 둥지 증후군 같은 얘기는 다 빼버려도 한 친구의 말은 두고두고

씹힙니다. 젊어서는 시어머니 죽기까지 8년을 병 수발하고,

숨 좀 돌리나 했더니 이젠 남편이 뇌경색으로 쓰러졌다는군요. 평생에

돈이라고는 벌어보지 못한 남자랍니다.

지지리도 복 없는 여자라면서도, 누워만 있는 남편 곁을 한나절도 마음 편히

비울 수 없었다는 그녀입니다. 가정은 아내에게 떠맡기고 평생 자기 좋은

일만 찾아 즐긴 남편에게 무슨 애틋함이 있으랴만, 아내 없으면 불안에

떠는 남편이 밉다가도 측은해집니다.


영화 ‘라스트 미션’의 남자는 막판에 참회라도 하지, 사지가 성할 땐 한없이

자기애에 빠져 전국을 돌다가 병석으로 돌아온 그. 한평생 도움이 되지

않은 남편으로 접고 살았다는 그녀.


그렇게 병시중이 시작된 18년 되던 해 남편이 죽었습니다. 뭐 줄 게 없어

애증은 남겼느냐고 탄식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커튼을 여니 흰 눈이

내립니다. “어머, 눈이 와요.” 반가워 소리치고 돌아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순간 그 흔한 일상이, 말도 나눌 수 있는 사람조차 내겐 없다는,

알싸한 현실이 엄습합니다.

그제서 남편의 존재가 무엇을 해주는 게 없더라도, 존재만으로 고마운

대상임을 알았답니다. 그녀가 나를 향해 말합니다.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다”라고. “가족 있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연말에 운악산 운주사를 찾았습니다.

이 겨울에도 처마에서 ‘뎅그렁뎅그렁’ 시를 쓰고 있는 풍경(風磬)과

눈인사를 나눕니다. 겨울 풍광이 아름답습니다.


풍경이 시를 짓고 바람이 낭송하는 ‘소리 시’에 오감을 열고 희락에 젖습니다.

뎅그렁, 풍경이 쓴 시가 산을 고요히 감싸는 산사의 정경을,

보고 듣고 느끼기를 이어가는데, 마음을 시리게 한 그녀의 끝말이

풍경소리처럼 흔들립니다.

“셰익스피어가 그랬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게 인생’이라고.”

뎅그렁‚ 소리 시의 결구가 물결치는 겨울 산사의 풍경(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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