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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나 Dec 07. 2020

통영 미륵도 이야기

삼칭이길에서 본 일출

통영 미륵도(彌勒島)는 남편이 근무했던 연구소가 있는 곳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주말이면 자주 놀러 갔었던 친근한 동네다. 그 당시 우리 집이 있던 부산에서 그곳까지 보통 4시간 정도 걸렸지만,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바다 풍광과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힘든 줄 모르고 다녔다.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의 바다가 통영운하다. 지금은 통영대교와 충무교로 연결되어 있지만, 오래전 이 곳은 썰물 때는 사람들이 걸어 다녔고,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와 너비 10여 m의 물길이 생겼다고 한다. 이 물길이 확장되어 통영 운하가 1932년에 완공되었고, 그때쯤 운하 밑으로 양쪽을 연결하는 통영해저터널도 개통되었다.     



통영 사람들은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의 운하 부근을 '판데목'이라고 부른다.     

판데는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에 쫓긴 왜병들이 그 판데목에 몰려서 엉겁결에 그곳을 파헤치고 한산섬으로 도주하였으나, 결국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는 곳이다. 그래서 판데라고 부른다. 판데에서 마주 보이는 미륵도는 본시 통영과 연결된 육로였는데 그러한 경위로 섬이 되었다. 미륵도에는 봉화를 올리는 고봉 용화산이 있고 그 아래에 봉수골, 더 내려오면 통영항구가 바라보이는 해명나루가 있다.   -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     



통영대교를 건너 미륵도에 들어서자마자 좌회전을 해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봉평동이 나온다. 여기서 봉수골 용화사 쪽으로 들어서면 전혁림미술관이 있다. 전혁림 선생은 한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통영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림을 보는 눈은 없지만 미술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예술가의 혼이 느껴지는 곳이다. 미술관을 나와 용화사로 향하는, 벚꽃이 아름다운 길에는 아구찜을 잘한다는 맛집이 있고, 요즘 아기자기한 카페, 사진관이 새로 생겼다.  


섬 중앙에 있는 미륵산이 있다. 산 정상 가까운 곳까지 올라가는 통영 케이블카가 10여 년 전부터 운행되고 있다. 이전에 난 힘들게 걸어서 미륵산 정상에 올랐었는데, 이젠 미륵산 458.4m 정상을 케이블 카 덕분에 쉽게 올라갈 수 있게 됐다.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바다 풍경은 마치 예술 작품 같다. 시원하게 펼쳐진 다도해는 보고 또 봐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 동쪽으로 더 가면 도남동이다. 마리나 리조트, 새로 지은 스탠포드 호텔이 있고, 주변 풍경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통영 국제음악당이 있다. 여기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삼칭이길’이 나온다. 이 길은 해안선을 따라 구비구비 3.8㎞나 이어지는데, 한쪽은 넘실대는 바다이고 다른 한쪽은 기암절벽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산책길, 자전거 길이다. 특히 떠오르는 태양에 바다와 기암절벽이 붉게 빛나는 광경을 본다면, 누구도 이 길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라.     


‘삼칭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통제영의 ‘삼천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삼천진은 지금의 통합 사천시에 있는 삼천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통영시 산양면 신전리에 있었다. 누군가는 외설스런 전설로 ‘삼칭이길’의 유래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자극적인 재미를 위한 얘기이고, 이 길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존재가 확실한 ‘삼천진’에서 유래한 것이 맞다고 본다.    



“광해군 11년(1619년)에 사천현 삼천진을 미륵산 아래로 옮기고 삼천포라 했다.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050척(615m)이었다. 무관 9품 권관 1인과 진무 16인, 지인 7인, 사령 13인이 지켰으며 병력은 거북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에 수군 장졸 수가 227인이었다”라고 전해진다.    - 출처 : 산양읍지


아직도 수군지휘관의 호령이 들리는 듯하고, 군졸들의 점호 모습, 훈련 장면 때로는 군벌(軍罰)을 받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 듯하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 조선수군 삼천진이 있던 ‘삼칭이’ 본 마을 이운마을이다. 삼천진 본진이 이운에 있었다     


이운마을은 국립수산과학원 남동해연구소 앞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널따란 마을 앞바다에서 채취하는 풍부한 해산물로 인해 먹거리가 넉넉하던 동네였다. 포구도 안쪽으로 들어와 있어 수군기지로써도 손색없는 곳이었기에 이미 조선시대부터 이운은 삼천진의 최적지로 꼽혔다.   - 출처 : 한려투데이(http://www.hanryeotoday.com)     



미륵도에는 해안선을 따라 멋진 드라이브 길이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가는 산양일주도로, 풍화리 일주도로(지방도 1021번)이다. 도남동에서 시작된 산양일주도로는 영운리에서 삼칭이길과 만난다. 그리고 일주도로를 따라 남남서 방향으로 1km쯤 가다가 보면 미래사 입구로 들어가는 미륵산길이 나온다. 이쪽으로 올라가면 미래사 부근에서 편백나무 숲길을 찾을 수 있다. 향긋한 숲길 끝에는 시원한 다도해 풍경이 또 나타난다.     


다시 산양일주도로로 들어서서 1.5km쯤 가면 신전삼거리를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박경리기념관이 있고, 왼쪽 일주도로를 계속 따라 가면 달아전망대가 나온다. 달력에서 자주 보던 다도해의 붉은 노을 풍경 사진은 대부분 달아공원에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 오래전 여름철 달아공원의 아름다운 일몰을 보고, 어두워진 길을 내려오면서 반딧불이를 만났었다. 지금은 훌쩍 커, 어른이 된 우리 아들들이 그 풍광을 기억하고 있을까.      


달아공원을 지나 일주도로를 따라 욕지행 여객선을 타는 삼덕항 쪽으로 가다 보면 당포항이 나온다. 길거리 옆에 허접하게 서있는 당포성지 안내판이 있다. 입구도 진입로도 불분명해서 보인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그런 곳이다. 이 곳을 잘 몰랐을 때는 ‘일본 사람들이 만든 유적지가 있나? 그래서 관리가 부실한가?’ 이런 생각을 했다.    

 

오래전 남편과 친분이 있는 일본인 해양학자가 통영을 방문했을 때, 당포성지를 찾아갔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당포에는 ‘일본과 연관된 뭔가가 있나보다.’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왜 거길 찾아갔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고 지나치는 곳을 외국인이 찾았다는 것에 대해 약간은 부끄러웠고, 궁금증도 생겼다.   


  


배 위에는 사람 한 명 없이 용머리를 치켜들고 달려드는 이 거북함은 총환을 맞으면서도 천연스럽게 돌진하기만 했다. 실로 거북함은 해상의 괴물이었고, 그 앞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배도 이길 수 없는 무적함(無敵艦)이었다.     

이렇게 접전하는 동안, 왜적들은 사기를 잃기 시작했고 싸움을 지휘하던 왜장 구루시마는 중위장 권준이 쏜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우척후장 김완과 군관 진무성은 화살을 맞고 떨어지는 적장수의 목을 베었다. 이때부터 왜병들은 일시에 흩어지면서 가까운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순신의 함대는 일제히 맹격을 가하여 왜선 21척을 모두 불태우고 깨뜨렸다. 당포해전이었다.

    

※ 당포해전

1. 일시 : 1592. 6. 2

2. 장소 :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당포)

3. 전과 : 적선 21척 격침, 적장 가메이 코레노리 사살     

- 출처 : 경남도청 http://www.gyeongnam.go.kr/yisunshin     



당포는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 장군이 승리했던 당포해전이 벌어진 곳이고, 그 해 7월 한산대첩 당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향해 출항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통영에서는 해마다 8월이면 한산대첩축제가 열린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왜군을 한산도와 미륵도 사이의 넓은 바다로 유인해서 싸웠던 학익진 전법을 펼치는 것이다. 이 행사는 조선 수군의 역할을 맡은 배들이 실제처럼 당포항에서 출발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소중한 역사의 현장으로 당포는 보존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는 곳이다. 당포성지에서 생생한 역사를 배울 수 있고, 이야기가 살아있는 관광자원으로 개발되어 알려지면 좋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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