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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나 Dec 11. 2020

추억 속의 아버지

어릴 때,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었고, 깐깐한 엄마를 피할 수 있는 안락한 피난처였다. 나의 필요를 내 입장에서 해결해주시는 분이었다. 기분 좋은 추억의 많은 부분에 아버지가 함께 하신다. 뿌리 깊은 유교사상을 갖고 계셨던 분인데, 아들 없이 네 자매를 둔 당신의 허전함을 우리들에게 표현하신 적이 없었다. 참 온화한 분이었다.    

 

아버지 팔베개에 누워있으면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여인으로 변한 뱀 이야기도 있었고, 위독한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여인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 여인이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던 망우리 고개에서, 지혜롭게 호랑이를 속여 무사히 고개를 넘어갔다는 이런 이야기들을 내 아들은 내게서 들으면서 자랐다.     


아버지는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다 해주셨던 것 같다. 주먹을 아버지 양손 사이에 빠르게 넣었다 빼는 ‘쌀, 보리’ 놀이부터, 아버지 발로 내 몸을 들어 올려 비행기도 태워 주셨다. 아버지 어깨 위에서 무등(목말) 타기, 팔에 오래 매달리기 등등.... 아버지 발 위에 내 발을 겹쳐 마루 위를 함께 걷던 모습도 떠오른다.  

   

60년대 중반 우리가 살던 청량리에 시대극장이 있었다. 어떤 가수의 쇼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화려한 무대에서 춤을 추던 댄서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아버지와 함께 쇼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찐빵 집에 들어갔었다. 연탄난로 위, 노란 양은 주전자에서 고소한 보리차 냄새가 났다. 그때 먹었던 팥이 듬뿍 들어간 찐빵과 뜨거운 보리차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퇴근길에 아버지는 빵을 자주 사 오셨다. 이제 생각해보니 술을 드시지 않으니까 ‘아버지도 빵을 좋아하셨나!’ 이런 생각이 든다. 내 나이 60이 넘어서 이제야 아버지도 빵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다니, 죄송한 마음이 든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버지를 어머니 입장에서만 보고 판단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어머니처럼 잔소리하는 딸이 되어있었다. 특히 담배 피우시는 것에 대해 잔소리를 많이 했었다. 네 자매가 모두 결혼한 후, 동생은 친정집에 갈 때마다 아버지께 담배를 사다 드렸다. 난 담배 선물을 한 적이 없다. 어차피 끊지 못할 담배였는데, 기분 좋게 담배 몇 보루 안겨드려 볼 걸, 후회가 된다.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연금 받는 할아버지였다. 그런 소소한 경제력 때문에 노인회 회장을 맡고 계셨던 건 아닐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은 동네 할아버지들의 사랑방이었고, 이 분들의 점심 식사비용을 아버지가 많이 부담하셨던 것 같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아버지께 좀 더 좋은 딸 노릇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 제가 생각이 짧아 아버지 입장에서 아버지를 이해하질 못했어요.”

“제 허영심 때문에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했던 거 잘못했습니다.”

“아버지만큼 살아내기가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겠어요.”

“용서해 주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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