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회 신청을 마치고 양구 읍내로 나왔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숙소를 정하는 것이었다. 주말이라 면회를 온 가족들과 외출 나온 군인들이 몰려들어, 어디를 가든 북적이는 분위기였다.
양구 터미널 뒤편으로 이어진 골목은 작은 시장처럼 활기가 넘쳤다. 커다란 국밥 솥에서는 추운 겨울바람을 타고 흰 김이 피어올라 허공에서 춤을 추는 듯했고, 식당마다 창문 너머로 면회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집을 나설 때의 차가운 공기가 양구의 낯선 풍경으로 바뀔 때까지, 마른 빵으로 겨우 버텨온 고된 여정이었다. 하지만 성큼성큼 앞서가는 남편의 든든한 뒷모습을 보는 순간, 허기보다 뭉클한 안도감이 먼저 차올랐다. 나에게는 남편 그 자체가 따뜻한 배부름이었다.
골목을 따라 걷는 내내 시선은 자연스레 남편에게로 향했다. 얼굴은 조금 야윈 듯했지만 군복 속 몸은 오히려 단단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정말 남자가 되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군 생활이 얼마나 고된지, 무슨 일들을 겪었을지 궁금해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그런 내 속내와 달리 남편의 눈길은 줄곧 아이에게만 향해 있었다.
시장통에는 다섯 집 건너 하나꼴로 여관이 늘어서 있었지만, 우리는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 숙소를 고르는 일은 돈주머니를 찬 어머니의 몫이었다. 몇 군데를 들렀다 나오기를 반복하다가 골목 마지막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주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방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핑계 삼아 사정을 하자, 우리 가족을 번갈아 보며 작은방 하나가 있긴 하다며 말을 흐렸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그거 주시오" 하고 받아쳤고, 그렇게 우리는 하룻밤 묵을 자리를 정했다.
방은 주인장이 머무는 공간을 지나 짧은 복도를 따라 들어가야 했다. 미닫이를 열고 들어서자 세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만큼의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기저귀 가방조차 놓을 데가 없어 머리맡에 바짝 붙여야 할 정도였다.
축축해진 기저귀를 갈아주자 아이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옹알이를 시작했고, 그 소리는 처음 보는 아빠를 향해 있었다. 한 달 만에 군대에 가 얼굴조차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저렇게 핏줄은 알아보는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다섯 달이 넘도록 아이가 본 사람은 조부모님과 나, 그리고 막내 고모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어머니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번져 있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어머니는 고생은 없는지, 춥지는 않은지, 상관들은 잘해 주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쉬지 않고 물으셨다. 농사 준비는 걱정 말고 아버지 병환도 많이 나아졌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이셨다. 정작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숟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 문풍지가 바람에 울며 내는 가느다란 신음, 흔들리는 백열등 아래로 새어 나오는 희뿌연 숨결까지. 방 안에는 겨울밤 특유의 냉기가 가득했다.
안쪽 벽 쪽에는 아이가, 그 옆에 내가, 남편과 어머니가 나란히 누웠다. 문 가까이에 누운 어머니를 본 남편이 자리를 바꾸자고 했지만, 괜찮다며 고개를 저으셨다. 재를 넘고 버스를 세 번 갈아타, 하루 종일 버스에 흔들리다 저녁 여섯 시가 되어서야 만난 남편과 아들이었다.
남편이 바로 곁에, 또 그 옆에 어머니가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이상하게 복잡해졌다. 남편을 본 지 다섯 달이 넘었다. 자대 배치를 받았다는 편지를 받은 뒤 답장을 보냈지만, 그 후로는 소식이 없던 차였다. 어쩌면 남편이 보낸 군사우편은 평창 우체국 어딘가에서 겨울을 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며 생각하고 있었다.
재를 넘고 골짜기를 타고 들어가는 깊은 산골에 서는 눈이 오기 시작하면 마당을 벗어나는 것조차 큰일이었다. 눈이 녹아 얼어붙은 길 위에서는 동네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경운기조차 꼼짝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마다 11월이 되면 겨우내 먹을 식량과 생필품을 고방에 가득 쌓아 두어야 했고 올해도 어김없었다.
산골의 겨울은 모든 것을 멈춰 세웠고, 편지 또한 우체국에서 봄을 기다려했고, 군대 보낸 아내의 심정 또한 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헤어진 지 다섯 달은 결코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가을과 겨울을 보내는 동안 어딘가에 멈춰 선 듯했다. 꼼짝 할 수 없는 산골의 겨울을 혼자 아이를 안고 오직 품 안의 작은 아이에게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견디어 내고 있었다.
아이의 배냇저고리가 어느새 작아져 소매 끝으로 통통한 손목이 밀려 나올 때마다, 대견함보다 먼저 말간 서글픔이 차올랐다. 이 눈부신 성장의 순간을 함께 바라봐 줄 단 한 사람의 부재가 집 안 구석구석을 찬 공기로 채워 놓았고, 아이가 처음 옹알이를 하고 방긋 웃음을 지을 때마다, 그 미소를 받아 줄 그의 눈빛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축복의 기쁨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은 또 다른 외로움이었다.
어머니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고, 아이도 입을 오물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남편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틈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며 부풀어 오른 마음이 풍선처럼 푹 꺼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사이 새벽빛이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짧은 만남의 아쉬움을 남기고 여관을 나서려던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을 열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여주인이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오래된 연애 드라마의 조연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는 말했다.
“할머니는 아기 업고 한 시간만 바람 좀 쐬고 오세요.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요.”
그 말에 내 마음은 순식간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밤새 단 몇 분이라도 둘만 있고 싶었던 터라, ‘아, 이분이 우리 속마음을 읽으셨구나’ 싶어 괜히 남편 손을 더 꼭 잡고 어머니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으셨다.
“얘들은 그런 애들이 아니에요.”
여주인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한술 더 떴다. “아이고, 지금 한창인 젊은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마나 애틋하겠어요.”이번엔 정말 희망이 고개를 내미는가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미소를 머금은 채 두 번째 칼을 뽑듯 단호하게 잘랐다.
“아니라니까요.”
그 짧은 한마디에 내 부풀었던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그때 여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가 괜히 나섰나’ 싶은 얼굴로 나를 보더니, 어딘가 미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 연민 가득한 눈빛은, 방금 전까지 하늘을 날다 추락한 내 마음이 그대로 비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이후 남편은 한 달에 한 번 원주로 출장을 나올 기회가 있었지만, ‘그런 애들이 아니었기’에 둘째가 생기기까지 무려 아홉 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머니 말씀처럼 정말 우리가 그런 애들이었다면, 둘째 사이에 시부모님과 우리 부모님처럼 여섯이나 여덟 남매를 두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궁금해졌다. 어머니는 어떻게 우리가 그런 애들이 아니라는 걸, 그토록 단번에 알아보셨을까.
이 이야기를 꺼내면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너무하신 것 아니냐"라고. 나는 어머님을 사랑하고, 지금도 깊이 존경한다.
군대 간 남편 대신 어머니는 빈자리를 느낄 틈이 없도록 나와 아이를 살뜰히 챙겨 주셨다. 그 때문에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웃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법,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물러서지 않는 법, 속상해도 품위를 잃지 않는 법. 말로만이 아니라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다. 그래서 나는 친정엄마에게도 스스럼없이 말하곤 했다.
“난 엄마보다 어머니한테 더 많이 배웠어요.”
겨울 준비를 위해 지붕을 수리하다 다친 아버님, 손녀 출산으로 병원비로 그해 농사 돈을 다 써버린 집안 형편, 며느리와 손녀를 아들 대신 품에 안은 채 겨울을 나야 했던 어머니의 어깨. 그럼에도 미소를 있지 않고 생활해 나가던 그 강인함을 남편이 없는 동안 어머니에게 다 배웠다.
훗날 둘째가 생기기까지의 사연을 방송에 제보해 촬영을 마쳤을 때였다. PD가 웃으며 물었다. “그때 왜 두 분을 다시 방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셨어요?”어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셨다. “쟤한텐 남편이지만, 나한텐 그전에 아들이지.”그 한마디로 촬영장은 웃음바다로 만들 정도로 유머를 간직한 분이었다.
오늘 내가 이 이야기를 웃으며 꺼낼 수 있는 것도 어머님 덕분이다. 지금은 곁에 계시지 않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신 분. “너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라고 등을 밀어주시던 그 목소리 덕분에 나는 든든한 남편 곁에서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참 자주도 투닥거렸다. 사소한 일에 날 선 말들이 오갈 때마다, 곁에서 지켜보던 어머니는 ' 쟤들은 그런 애들이 아니야. 본래 그리 쉽게 흔들릴 아이들이 아니란다." 마치 우리의 미래를 미리 읽으신 듯 형제들에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어머님의 그 말씀이 오늘 밤 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귓가를 맴돈다.
그리운 어머님.
어머님 말씀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 크고 작은 파도를 만나도 결국은 나란히 서서 건너왔다. 오늘도 아범과 함께 서로 기대어 편안히 지내고 있다고, 어머님이 심어 준 믿음 덕분에 여기까지 잘 왔다고 꼭 전해 드리고 싶다.
전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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