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월미수산 아쿠아리움-9
월요일 오후였다.
아쿠아리움을 돌아다니면서 동물들을 관찰하던 지은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상어들이 모여있는 커다란 수조에 커다랗고 시커먼 고기가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지은이 자세히 바라보자, 시커먼 물고기는 커다란 지느러미를 드러내고 저 멀리서 다가왔다. 그건 바로 바다의 난폭자 범고래였다.
지은은 얼마전 국제학술지 '아프리카 해양과학 저널'에서 봤던 남아프리카 해안에서 범고래가 2분 만에 백상아리를 사냥해서 영양가가 높은 백상아리의 '간'만 쏙 빼서 먹어치운 사례를 떠올렸다. 당시 봤던 영상 속 거대한 백상아리는 귀여운 범고래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한마리 물고기에 불과했다.
지은은 [월미 아쿠아리움] 청상어와 귀상어 수조 한 가운데를 유유히 돌아다니는 범고래를 보고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헉......범고래가 청상어 수조를 어떻게 들어왔지?'
범고래가 다가오자, 같은 수족관 안에 있던 청상아리 스무 마리가 한쪽 구석으로 조용히 움직이더니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난폭한 귀상어도 저 멀리 구석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헤엄치고 있었다.
범고래는 지은의 앞으로 천천히 오더니 마치 손을 흔드는 것처럼 옆으로 누워 재롱을 부렸다. 저 멀리 문선생이 보였다. 지은은 놀란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문선생님, 범고래가 상어 수조로 들어왔어요!"
“왔네? 괜찮아. 지금 범사원이 자기에게 재롱부리는 거야.”
“범사원이요? 이 범고래 이름이 범사원이에요?”
“응. 이름은 범사원이야. 귀엽지?”
사육사가 먹이를 주는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선생이 지은을 보고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문선생 앞으로 뛰어가니 커다란 청상아리 한 마리가 배를 드러내 놓고 둥둥 떠 있었다. 놀란 지은은 문선생에게 물었다.
“애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청상아리 같은데요?”
“맞아. 청팀장이 스트레스를 좀 받았어. 진짜 아픈 거라면 병동으로 옮겨서 하루이틀 입원시키고 비타민 주사 좀 놔줘야지. 딱 보니 청팀장 지금 꽤병 같은데..음...”
“청팀장이요? 애 이름은 청팀장이에요? 청팀장이 스트레스를요? 그나저나 같은 수조 공간에 이렇게 상어와 범고래를 같이 넣어도 괜찮을까요?”
어느새 범고래가 지은의 옆으로 와서 둥그렇고 귀여운 얼굴을 내밀더니 마치 물총처럼 물을 내뿜었다.
“아앗. 차가워.”
“범사원이 지은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네?”
“네?”
“여기 수조에 잠시 있는 2개월 동안 상어들을 괴롭히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방금 말한 거야.”
“2개월 동안 여기 청상어 수조에요? 아.... 그런데 선배님은 진짜 여기 아쿠아리움에 있는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으시는 것처럼 너무 찰떡같이 이야기하세요. 신기하다.”
“지은샘. 나 진짜 들려.”
“네?”
“애네들이 말하는 거 다 들린다고. 지은샘도 듣고 싶어? 얘네들하고 대화하고 싶어?”
“네? 어.... 하하... 들리면 좋죠. 아플 때 치료도 잘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
문선생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은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문선생의 옆으로 같은 속도로 물 밑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청상아리와 귀상어의 지느러미가 보였다. 지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아쿠아리움이지만, 청상어와 귀상어, 그리고 범고래가 같이 돌아다니는 수조에 혹시 빠진다면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청상어와 귀상어 옆으로 범사원이라고 하는 범고래가 스윽 지나가니, 청상어와 귀상어가 잠시 멈추고 셋이 머리를 맞대고 마치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 하하. 저를 여기 상어가 있는 곳으로 밀려고 하는 건 아니시겠죠?”
“왜? 내가 여기 수조로 지은샘을 밀 거 같아서?”
“어... 하하.. 그.. 그럴리가요.”
“그래? 지은샘은 나를 믿는 거지?”
문선생은 방긋 웃으면서 지은의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문선생이 순간적으로 옆으로 다가와서 놀란 지은은, 한쪽 발을 상어들과 범고래가 우글대는 수조 안에 빠뜨릴 뻔했다.
“어어... 선배님, 좀 위험한 거 같아요. 저 빠질 거 같아요. 더 밀지 마세요.”
“그래?”
문선생은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손에 걸려있던 동물용 청진기를 빼서 지은샘에게 전달했다. 그리고는 구석에 배를 뒤집고 누워있는 청팀장이라고 하는 청상아리를 가리켰다.
“청팀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래?”
“아... 어.. 네. 그러면 선배님의 청진기로 한번 애내들의 숨소리를 들어 볼까요? 어디가 아픈지?”
지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문선생을 바라보면서 문선생의 동물용 청진기를 손에 들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이윽고 배를 뒤집은 청팀장 옆으로 온 지은은 조심스럽게 쭈그리고 앉아서 청팀장의 피부에 문선생의 청진기를 갖다 댔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아이고 나죽네. 아파요, 아파. 머리가 아파. 지은 선생님, 저 원래 평생 감기 한번 안 걸려본 상어인데, 아이씨... 그렇게 청진기만 갖다 대지 말고 잘 모르면 타이레놀이나 좀 줘요. 아니면 비타민 주사라도 좀 놔주던가. 아프다고 하면 약을 주던가 주사를 놔줘야지 지은샘은 허구한 날 청진기만 갖다 대. 아이고. 청팀장 죽네.”
문선생의 청진기를 통해 귀에 들리는 선명한 사람의 목소리에 놀란 지은은 눈을 뜨고 깜짝 놀라면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문선생을 바라봤다.
“네? 선배님이 저에게 말씀하신 거예요? 타이레놀 달라고?”
“우리 후배님 뭐라는 거야.”
“어.... 네?”
“말 많은 거 보니 꾀병이구만. 내가 아니라 저기 배 뒤집고 누워서 꾀병 부리는 청팀장이 이야기한 거야.”
문선생은 청상아리 옆으로 걸어오더니 한 발로 배를 뒤집고 누워있는 청팀장을 툭 치면서 말했다.
“꾀병 부리지 마라. 계속 꾀병 부리면 내 다리로 암바 걸어서 청팀장 정신 번쩍 차리게 할 거야.”
그 순간 배를 뒤집고 누워있던 청상아리는 바르게 자리를 잡더니, 풍덩 하고 수조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저 멀리서 지켜보는 청상아리 떼들 속으로 스윽 ~ 헤엄쳐 들어갔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이 배를 뒤집고 누워있던 청상어가, 문선생의 말 한마디에 후다닥 수조로 뛰어들어가더니 멀쩡히 헤엄치는 것을 본 지은은 충격에 휩싸였다.
“진짜 꾀병이었어요!”
“내가 뭐랬어, 그러면 이번에는 우리 저기 범사원이 자기 목소리도 좀 들어 달라고 하는데 좀 들어줘봐.”
“네? 범사원이요? 저기 범고래?”
지은의 옆으로 범고래가 헤엄쳐 오더니 커다란 입을 쩌억 벌렸다. 문선생은 구석에 있던 파란 통을 가지고 오더니 그 안에 들어있는 정어리를 손에 들고,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정어리 아가미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정어리를 범고래에게 던져주자 범고래가 냉큼 받아먹었다.
“저기 범사원도 청진기 함 대봐. 뭐라 하는지.”
약간 혼이 나간 듯한 지은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 후, 문선생의 청진기를 범고래의 머리에 갖다 대고 눈을 감았다.
“앗, 써! 정어리가 써요. 문선생님이 나 모르게 또 정어리 안에 비타민 알약 넣었네. 이거 말고 달달한젤리형태의 어린이 비타민이 좋은데....에이. 씨.”
“뭐? 에이 씨? 너 그러다가 8도 하겠다? 이게 콱 그냥!!”
범고래의 목소리에 놀란 지은이 눈을 뜨자, 문선생이 후다닥 달려오더니 손으로 범고래의 머리를 한때 때렸다. 아직 청진기가 범고래의 머리에 닿아 있던 지은의 귀에 방금 전 들은 20대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아프지롱 ~ 저 갑니다. 문선생님, 저는 여기 콜센터에서 두 달 인턴 기간 마치고 돌아갈게요.”
지은은 눈이 똥그래진 채 문선생을 바라봤다. 문선생은 웃으면서 지은을 향해 말했다.
“이제 이곳 월미 아쿠아리움의 비밀을 알겠어?”
***
잠깐 말이 없던 지은은 두 눈이 똥그래지더니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문선생의 청진기를 높이 들면서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청진기 대박! 인공지능을 이용한 언어 번역 기술이 진짜 많이 발전했는데요? 동물의 말이 그럴싸하게 번역이 되는 걸 보면, 구글에서 문선생님 청진기 만들면서 동물언어 번역과 관련한 인공지능 기술을 많이 집어넣은 건가? 왜 그거 있잖아요. 고양이 언어 번역기 앱 같은 거. 야옹야옹 하고 고양이가 말하면 안녕! 이라고 번역해 주는, 선배님. 이 청진기 그런 거죠? 이거 얼마에요?”
“아이코, 아직 멀었구먼. 우리 지은샘 이렇게 순진해서 어쩐담..... 아휴,.. 내일 봐 그럼.”
문선생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지은샘의 손에 들린 청진기를 다시 가져갔다.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일단 오늘은 그만 퇴근하고 푹 쉬고 내일 보자고.”
“내, 선배님. 내일 봬요. 내일은 또 어떤 깜짝 놀랄 신기술을 보여주실지 기대돼요. 대한민국 의료기계 인공지능 기술발전 속도 대박!”
지은은 문선생의 청진기가 구글의 실시간 번역 기능과 인공지능 기술이 결합된 최첨단 기술로 만든 동물용 청진기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문선생을 보면서 크게 소리쳤다.
"이따가 집에 가서 동물언어 번역 청진기를 검색해 볼께요."
***
그날 저녁, 문선생이 집으로 들어가자 올피선생이 먼저 퇴근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자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어디 아파? 열나는 거 아니지?”
문선생은 후다닥 올피선생 옆으로 뛰어가서 손으로 올피의 이마를 짚었다.
“아니야, 나 안 아파.”
올피는 일어서서 문선생을 부드럽게 꽈악 안으면서 말했다.
“우리 떠나자.”
“뭐래. 가긴 어딜 가. 설마 아까 그 로또 1등 당첨된 거야?”
문선생은 웃으면서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 문선생을 보면서 올피가 그녀의 뒤에서 백허그를 하면서 말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