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월미수산 아쿠아리움 - 11
매주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월미수산 홍보팀에서는 다음 달 진행되는 월미수산 홍보 이벤트 아이디어 회의가 열리곤 했다. 그날도 월미수산 홍보팀 돌팀장은 팀원들을 모아놓고 다그쳤다.
"자자, 다들 쌈빡한 홍보 이벤트 아이디어 좀 내놔 봐. 지난달 우리 팀에서 진행했던 사내 이벤트 반응이 시원찮았던 거 알지? 아니, 보석같이 반짝이던 우리 홍보팀 팀원들이 병든 닭처럼 오늘 다들 왜 이래?"
"팀장님, 아무래도 점심 먹고 바로 회의를 하니 눈이 막 스르르 감깁니다. 졸려 미치겠습니다."
돌과장이 감기는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그래? 그러면 내가 커피 쏠 테니, 다들 커피 먹고 힘내서 다음 달 사내 홍보 이벤트 회의하자고, 이번은 좀 쌈빡한 게 나올 수 있게 우리 모두 머리를 쥐어짜 보자."
돌팀장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서 팀의 막내인 돌사원에게 주면서 말했다.
"나는 샷 두 개 추가한 아아로하고, 다들 막내에게 주문해."
"와 우리 팀장님, 짱,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꾸벅꾸벅 졸던 월미수산 홍보팀 돌고래들의 눈이 반짝반짝해지면서 저마다 막내 돌사원에게 커피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돌사원은 선배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자, 정리합니다. 부장님은 샷 두 개 추가한 아아 하나, 아아 3개, 따아 2개, 따라 1개, 아라 2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코허니라벤더허브솔트진저카라멜블랙당라떼 1개."
발음하기도 어려운 커피 메뉴를 들은 홍보팀 돌고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초코허니라벤더...뭐라고? 그게 뭐야? 처음 들어보는 메뉴인데? 누가 주문한 거지?"
돌팀장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자, 종이를 들고 있는 막내 돌사원이 배시시 웃으면서 손들었다.
"이번에 카페 월미도에서 새로 나온 메뉴인데, 다른 메뉴들보다 좀 비싼 메뉴거든요..... 팀장님, 그러면 저 다른 거 먹을까요?"
"응? 아냐아냐. 궁금해서 그냥 물어본 거야. 요새 새로 나오는 메뉴들이 이름들이 하도 길어서 외우기 힘든데, 우리 돌사원은 MZ세대라서 그런가 이런 거는 아주 잘 외우는구먼, 그거 초코허니 머시기 그거 맛있나?"
"저는 좋아합니다."
"그래? 그러면 한잔 더 사와. 나머지 사람들도 초코허니 머시기 맛 한번 보자. 나도 궁금하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지금 바로 사 오겠습니다."
돌사원은 밝은 표정으로 돌팀장의 카드를 받아서 돌고래 수조 구석에 있는 배수로로 들어갔다.
우당탕탕탕
잠시 후, 막내 돌사원이 들고 온 커피를 마시면서 진행한 회의 결과, 다음 달의 월미수산 사내 홍보 이벤트가 아래와 같이 확정되었다.
[월미아쿠아리움을 방문해 주신 고객님들과 월미수산 임직원들의 캐리커쳐를 예쁘게 그려드립니다.]
***
지은이 이곳 월미아쿠아리움에서 일을 한 지 3주 정도가 지나고 있었다.
월미수산 데이터분석팀 범팀장이 외부미팅을 마친 후 돌아오는데, 아쿠아리움 대회의실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월미수산 홍보팀에서 진행하는 이달의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행사장 옆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데 저 멀리서 홍보팀의 돌팀장이 뛰어오더니 범팀장에게 말했다.
“엇, 형님, 우리 팀에서 진행하는 캐리커쳐 그려주는 행사인데, 형님도 한번 그려보세요.”
“아, 나 지금 바빠서.”
사람 모이는 북적거리는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 범팀장은 애당초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늘 방문한 아쿠아리움 고객들의 수가 적었고, 월미수산 직원들의 참여도 적었는지 홍보팀 돌팀장이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형님, 나 한 번만 살려줘요. 지난 달 이벤트도 망했는데, 이번달 이벤트까지 망하면 저 돌상무님께 대박깨집니다. 응?응?응?”
후배 돌팀장의 성화로 마지못해 행사장으로 들어가니 여러 명의 캐리커쳐를 그려주는 화가들이 월미수산 직원과 방문고객들의 캐리커쳐를 그려주고 있었다. 범팀장은 그중의 한 화가 앞에 줄을 섰다.
‘이렇게 북적거리는 거 딱 질색인데... 그냥 도망가야겠다.’
북적거리는 장소를 싫어하는 범팀장은 대충 분위기 봐서 자리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그만 홍보팀의 임원인 돌전무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돌 전무도 자신의 캐리커쳐를 그리기 위해서 범팀장 옆의 줄을 서 있었다. 돌전무 옆에는 월미아쿠아리움 곰소장과 문 선생, 그리고 지은도 캐리커쳐를 그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돌전무는 범팀장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들어 소리쳤다.
"어, 우리 범팀장도 왔구먼. 바쁜데 홍보팀 행사 참여해 줘서 고마워! 잘 그리고 가."
빼박 상황이 되어버린 지라 범팀장은 도망가지 않고 한번 캐리커쳐를 그려보기로 했다. 월미수산에서 고객 데이터분석 업무만 수십 년을 한 범팀장은 업무 때문인지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가 캐리커쳐를 그리는 분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각각의 특징이 있었다. 실물보다 엄청 예쁘게 그려주는 분, 만화처럼 그리는 분. 초상화처럼 그리는 분, 엉망으로 그리는 분..
그런데 범팀장이 선 줄의 그분은 달랐다. 사람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일부러 빠르게 그리시는 건지도 모르겠으나 그 Quality는 어디에 내놓아도 견줄 수 있는 그런 수준이었다.
3분 만에 그려진 캐리커쳐를 받은 범팀장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캐리커쳐의 특징은 사람을 이쁘게 그려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작은 눈, 낮은 코. 두터운 입술에 광대뼈까지... 범팀장이 생각하는 외모 콤플렉스를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사무실로 돌아온 범팀장이 주변을 보니 다른 작가들이 그려준 캐리커쳐는 실물보다 이쁘게 그려졌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들 자기의 캐리커쳐를 책상 위에 두고 자랑하기에 바빴다. 반면 범팀장은 조용히 안 주머니에 넣었다. 월미수산 직원들이 볼 때마다 킥킥거리고 웃었기 때문이다.
버릴까.... 하다가 범고래의 모습으로 퇴근하면서 집으로 가지고 왔다. 집에 와서 보여주니, 범팀장 와이프도 범고래일 때와 인간일 때의 남편 얼굴이 대박 똑같다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와이프가 자신의 인간 캐리커쳐를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자 범팀장은 더 기분이 나빠졌다.
'인간으로서 내가 저렇게 생겼나? 범고래일때는 좀 잘생겨 보였는데..“
범팀장은 와이프 몰래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저 인간 캐리커쳐보다는 잘 생긴 것 같은데... 첫! 지만 이쁘면 단가.. 나쁜 마누라 같으니.'
범팀장은 짜증을 내면서 그 인간모습 캐리커쳐를 휴지통 근처에 두었다. 얼마 후 그 캐리커쳐는 범팀장의 집에서 자취를 감췄다.
***
시간이 흘러서 인간으로 변한 범팀장이 취미로 쓰는 소설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마지막 편집을 하고 테스트 인쇄본을 받자 출판사 편집장이 물어봤다.
"책띠지와 책날개에 우리 범작가님 사진 실어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사진이라.... 이런 건 우리 와이프님에게 물어봐야지.'
범팀장은 소설의 테스트 인쇄본을 집에 가지고 와서 와이프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번 출간되는 소설에 내 인간사진 넣어준다 하는데 증명사진 찍어둔 게 집에 있나? 넣지 말까? 못생긴 내 얼굴 나오면 책 더 안 팔리는 거 아냐. 뽀샵 처리를 해야 하나?"
"사진 말고 이걸로 해."
범팀장 와이프는 화장대 쪽으로 가더니 화장품 뒤에 숨겨진 그때 그 인간 캐리커쳐를 가지고 왔다.
"어? 안 버렸네?"
"잘생긴 울 남편 완똑 인간그림을 어떻게 버려."
범고래 범팀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와이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모든 월미수산 직원들이 나에게 못생겼다 해도, 천사 같은 와이프님이 잘생겼다 하는데 그럼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