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의 역사-확장판 12] 실리를 버리고 명분만을 쫓은 사대의 극치
... 내정 측면에서 큰 치적을 일군 광해군은 시야를 넓혀 국제정세를 살폈다. 당시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기존 중원의 지배자였던 명나라가 쇠퇴하고 신흥 강자로 '누르하치'의 후금이 부상하고 있었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 조선에선 명나라 편을 드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간 전쟁의 결과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드는 게 옳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연하게 중립을 취하며 조선의 실리를 추구한다는 복안이었다.
...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대의명분 등을 중시했던 서인들은 폐모살제는 물론 광해군의 중립외교도 크게 문제 삼고 있었다. 이에 서인들은 1620년부터 '반란'을 모의하게 된다. 추후 인조가 되는 능양군은 반란 모의 초기 단계부터 적극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인들은 짧지 않은 준비 기간을 가진 끝에 1623년 3월 13일 새벽을 거사일로 확정했다. 그런데 거사에 함께 하기로 했던 일부 사람들의 밀고로 거사 계획이 사전에 알려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다급해진 서인들은 관군에 의해 진압을 당하기 전에 거사일을 앞당겨 선수를 치기로 했다. 거사 당일. 반란군 총사령관인 김류를 비롯해 이중로, 신경진, 이귀, 최명길 등이 각각 군사를 이끌고 홍제원에 집결했다. 이와 별도로 능양군은 일부 반란군과 함께 먼저 궁궐로 직행했다. 홍제원에 집결했던 군사들도 신속히 능양군의 뒤를 따랐다.
...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 정권은 즉시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폐기했다. 이들은 친명배금 기조를 명확히 하며 후금에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후금에서 보낸 사신을 내치고 국서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추후 청나라(후금의 후신)에 간 조선의 사신들은 청나라 황제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시 후금의 위세가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이었지만 인조 정권은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 그해 12월 맹장 '용골대'가 이끄는 청나라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용골대의 청나라군은 오로지 인조가 있는 한양만을 목표로 초고속으로 진격했고, 중간에 보이는 다른 성들은 모두 스쳐 지나갔다. 불필요한 전투를 최소화하고 심장부를 정밀 타격해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계획이었다. 청나라군의 남하 속도는 과거 정묘호란 때보다도 훨씬 빨라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발이 묶이게 됐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