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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Jun 27. 2024

조선 통사의 서막...'정조 암살설'

[정변의 역사-확장판 13] 조선사 최고의 천재군주, 의문의 죽음 전말

정조대왕 어진. 조선사 최고의 천재군주였던 정조는 조선 후기 국가의 번영을 이끌었지만 석연치 않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후 조선은 퇴행의 길로 나아갔다.

#. 아래 내용은 6월에 출간된 '정변의 역사-확장판' 하이라이트 부분.


... 어느덧 영조가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했다. 예상대로 노론 벽파는 가열하게 반대했다. 대리청정은 곧 선위나 마찬가지였다.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을 때 고령의 영조가 사망하면 자신들이 그토록 우려했던 사도세자의 아들 즉위가 현실화되는 것이었다. 당시 노론 벽파의 핵심이었던 좌의정 홍인한의 말은 노론 벽파가 세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대리청정을 어느 정도로 반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동궁(정조)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을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더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정조를 차기 군왕이 아닌 그냥 생각 없는 어린아이쯤으로 여겼다. 


... 정조의 개혁 정치는 왕권 강화와 민생, 근대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 정조에게는 이를 통한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바로 '화성 건설'이다. 정조는 화성을 개혁 정치의 본산으로 삼고, 기존 '판'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모색했다. 일종의 승부수였다. 화성 건설에는 정조의 심복들이 총출동했다. 정약용이 설계하고 채제공이 총책임을 맡았다. ... 전세 역전을 직감한 정조는 장용영의 군사들을 동원해 노론 벽파가 보란 듯이 '무력시위'를 벌였다. 어느 날 정조는 '화성 능행'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때 수많은 장용영의 군사들이 황금 갑옷을 입은 정조를 겹겹이 에워싸 호위했다. 노론 벽파 신료들은 이 장면을 매우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봤다.


... 이제 노론 벽파는 완전히 코너에 몰렸다. 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대응 방안을 고심했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정국의 주도권은 정조에게 있었다. 지난 100년 간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노론 벽파 정권이 마침내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 일어났다. 정조가 오회연교를 발표한 뒤 보름이 지나 병석에 몸져누웠고, 그 보름 뒤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 정조의 죽음은 곧바로 격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왕의 암살설이 제기된 것이다. 이 주장은 정조와 뜻을 함께 했던 남인들을 중심으로 나왔다. 특히 정조 승하 2개월 뒤, 인동(현 경북 구미시) 지역의 남인 출신 거족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이 "임금이 죽었으니 의관이 의심스럽다"라며 처음으로 정조 암살설을 제기했다. 그들은 왕을 죽인 역적을 처단하겠다며 노비들을 동원해 관아를 습격했다. 하지만 관군에 의해 진압을 당했다. 다산 정약용도 정조의 죽음을 예사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저서인 '여유당전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만나면 전해져 들리는 말들을 이야기했으니. 당시 '한 정승'이 역적 의원인 심인을 천거해서 독약을 올려 바치게 했건만, 우리들의 손으로 그 역적 놈을 제거할 수 없다면서 비분강개하여 눈물까지 흘리곤 했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정승이란 바로 좌의정 '심환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노론 벽파의 영수였고 궁궐 주치의들이 모여있는 내의원의 총책임자(도제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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