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향기 따라 걷기 여행 추천
통영에 가면 백석시인이 반한 여인 란을 만나고 싶은 심정이 잘 드러낸 충렬사 계단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기곤 한다. 그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을 시어에서 찾아보았지만 늘 헛수고였다.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백석 시인은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바다, 통영을 잊지 못했다. 그의 여인 란을 그리워하며 바다에 실려 버렸기 때문일까? 통영은 문화예술이 숨 쉬는 삶의 결이 스며든 아름다운 동네다. 그중 봉평동 봉수골의 전혁림 미술관 옆 봄날의 책방은 마을을 살리고 문화예술이 공존하는 곳으로 열었다.
봉수골은 “코발트블루, 바다의 화가”로 불린 전혁림(1915∼2010) 선생을 통영시가 지정한 '화가 전혁림 거리'이면서 ‘봉수골의 아름다운 거리’라 불렀다.
용화사거리에서 용화사와 미륵산으로 이어지는 천천히 오래 걷고 싶은 봉수골은 사계절 꽃과 예술의 향기가 집집마다 가득 퍼졌다. 특히 4월이면 통영에서 벚꽃이 가장 동화스럽고 예쁜 봄을 만나 볼 수 있다. 마치 연분홍 물감을 칠해 놓은 듯 봉수골의 봄은 흠뻑 빠져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예전부터 맛있는 찜 가게가 많았던 봉수골에 아기자기하고 개성 넘치는 카페와 가죽공방, 김밥집 등 모든 세대가 아우르는 공간이 늘어났다. 전혁림 화백의 작품이 오래된 담벼락 곳곳에 걸려있고, 150년 된 마을의 수호신 인 느티나무 아래 시간을 보내는 동네 어르신의 여유로움, 젊은이의 해맑은 미소가 어우러져 오후의 한 때가 고요하면서 한적한 풍경을 만들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봉수골의 속살과 매력을 알고 싶다면 자세히, 오래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알 수 있다.
봉수골 골목에서 가장 핫한 곳은 전혁림 미술관과 봄날의 책방이다. 미술관은 색색의 타일 장식으로 꾸며진 외관부터 독특한 감성에 젖는다. 통영과 작가의 예술적 이미지를 넣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됐다.
아트샵과 전시실 2개의 건물로 나뉜 미술관은 입장료는 없다. 아트샵 공간은 전혁림 화백과 그의 아들 전영근 화백의 작품을 옮겨놓은 찻잔, 머그잔 등 생활 소품들로 구입도 가능하다.
전시실 공간은 1~3층이다. 1층과 2층에는 30여 년간 전혁림 화백이 남긴 작품과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고 3층은 그의 아들 전영근 화백의 작품으로 꾸며졌다. 작품마다 통영의 바다를 닮
은 듯한 짙은 청색과 강렬한 그만의 색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전혁림 화백의 열정을 담은 <통영항(2006)>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아꼈다고 전해졌다. 한편
올해 그의 예술혼을 잇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한 개관 20주년 기념을 맞아 전혁림 예술제가 열
였다.
미술관과 함께 봄날의 책방은 그야말로 책과 예술이 만나 이상적 공간이 만들어졌다. 책방 입
구는 정원에 온 것처럼 계절마다 다양한 식물을 볼 수 있다. 요즘 보랏빛, 연두, 초록, 노랑,
빨강의 색들로 채워졌다.
외벽에는 박경리, 김춘수, 윤이상, 유치환, 백석 등 통영과 인연이 깊은 예술인들의 글귀가 발
걸음을 멈춘다. 책방 주인장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 정성스럽다. 25평 남짓한 내부 공
간에는 청량한 통영의 바다를 연상하듯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린다. 바다책방, 그림책방, 책 읽
는 부엌, 작가의 방 등 테마별로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책을 고르는 것도, 공간에 스며드는
것도 이 책방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2층에는 책 여행자를 위한 북스테이 공간이 마련돼
있다.
공간 공간마다 허투루 두지 않았다. ‘바다책방’는 사라지면 안 될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
책과 함께 굿즈들이 놓여 있다.
여기에 통영화가 김재신 화백의 조탁기법으로 새긴 ‘섬’과 ‘바다’ 작품은 생동감으로 넘쳤다.
‘그림책방’은 그림으로 소통하는 화가들의 작품과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다양한 그림책과 그
래픽 노블, 그림에세이를 함께 만날 수 있는 방이다. 이 방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창밖을 보
면 전혁림 화백의 작업장이자 그의 생애를 담은 미술관을 볼 수 있다는 것.
《풀》과 《기다림》을 쓰며 만화계 오스카 하비상 수상하면서 세계가 인정한 그래픽 노블 작가
김금숙의 첫 에세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책도 소개돼 있다. 이중섭 화가의 ‘선착장을 내
려다 본 풍경’과 전혁림 화백의 ‘달밤’의 작품과 책이 큐레이션 돼 시선을 끌었다.
‘책 읽는 부엌’은 요리와 리빙, 가드닝 등 삶에 휴식을 주는 책과 자연과 함께하는 삶, 여성과
대안적인 삶을 담은 책을 소개하고 있다. 15년 차 숲해설가가 들려주는 나무와 꽃,
열매와 잎 이야기를 쓴 남영화 작가의 책 《숲의 언어》와 숲 체험 필수품인 루페가 전시됐다.
여기에 수제 종이에 실크스크린으로 손수 하나하나 만든 《물속 생물들》, 《우리는 작게 존재
합니다》 책은 아름다운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려운 것을 간단하게, 그리고 성실히 전달할
수 있는 책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는 척하는 책이 아니라 만든 이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하는
책,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책들 말이죠.” 《우리는 작게 존재합니다》 중.
‘작가의 방’은 통영에서 나고 자란 문인들의 책과 봄날의 책방이 주목하는 젊은 작가를 소개
하는 공간이다. 잠시 창틀에 비친 봄볕처럼 따사로운 햇살과 연둣빛 색에 아름다움에 취한다.
책방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운영된다. 국내의 굵직한 작가 초청 북토크, 원데이클래스, 미니
전시 등 지역 책문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백석시인이 사랑한 그 잔잔한 그리움이 서린 통영 바다를 넣은 책방의 이야기는 아주 멋진 일이었다. 봉수골은 오래 머물수록 그 가치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통영의 삶과 예술, 책 문화의 향기가 흐르는 봉수골에서 인문과 감성의 걷기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