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책을 읽으며 보낸 시간의 기억은 마을회관이다. 허름한 마을회관에 전집류의 책들이 전부였지만 그곳에는 친구와 숨바꼭질하기에도 먼지 쌓인 곳에서 책을 읽거나 비밀 이야기 하는 장소라 더없이 좋은 공간으로 기억되었다.
그런 공간의 기억들을 지금은 동네의 책방이 담아내고 있었다. 책방은 소소한 곳이지만 그곳을 들여다보면 색다른 발견의 장소이자 나를 알아가는 위로의 공간으로 느껴진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어릴 적 추억의 공간에서 때로는 삶의 책을 접할 수 있었고 그 장소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일상의 성장에 보탬이 되었다.
오늘도 나를 알아가는 공간을 찾아 나섰다. 창원시 사림동 어느 주택가 골목, 따뜻한 햇살 아래 낯선 고양이가 잠시 쉬어가고 매화꽃은 창가에 앉아 봄을 알리고 있었다.
밋밋한 벽 사이로 노란 간판이 보인다. 그러나 밤의 불빛은 은은하게 빛을 발해 책방을 밝힌다. 이곳이 박지현(40) 책방지기가 운영하는 책방 19호실이다.
밖은 차가웠지만 안은 따뜻하고 선명한 색감과 온기에 개인 안방에 온 듯하다. 6~7평 남짓한 작은 책방이지만 지현 씨만의 문학과 시, 여성 관련 책들이 빼곡히 채워졌다. 곳곳에 그녀의 책을 소개하는 꼬리표가 찾는 손님들의 시선을 훔친다.
벽에 걸린 그림 한 장이 이곳 책방과 잘 어울린다. 미국 사실주의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라는 작품으로, 지현 씨가 <사랑의 잔상들(문학동네, 2018)>이라는 책을 읽고 그림이 마음에 와 닿아 프린팅 하여 걸어 놓았다고. 작품은 고통만이 아니라 부서질 수 없는 인간성, 그 어떤 아름다움을 엿보았던 것 같다고 설명해 놓았다.
지난 1월 중순에 문을 연 지현 씨의 삶과 책방의 인연을 들어 보았다. 결혼 전 국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시, 소설 등의 문학을 좋아했었고 결혼 후에도 독서클럽을 9년 정도 활동했을 만큼 정체되어 있는 시간에 대부분 책을 읽거나 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을 꾸준히 하며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공간을 그려냈다. 학교선배가 운영하는 비건 베이커리와 책을 겸한 <고스란히>라는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일상을 들여다보면서 꾸준히 자기가 좋아하는 일과 여유 그 안의 독립된 삶이 잠시나마 부러웠다고 한다. 그렇게 공간을 내고자 3년 전쯤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사림동 주택가 골목의 분위기가 좋아 우연히 아이의 줄넘기를 사기 위해 들린 지금의 소품 가게가 인연이 되었다.
점포를 접고 싶다는 가게 주인의 말이 지현 씨의 바람과 맞아 자연히 계약으로 이어졌고, 하루는 페인트, 다음날은 조명, 인테리어 등 이렇게 책방이 꾸려지게 되었다.
‘책방 19호실’은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버지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도 비슷한 모티브의 공간이 있지만. 주인공 수전이 자주 가는 호텔 방 번호로 그저 몇 시간 동안 온전히 자기만의 공간에서 숨을 쉰다. 지현 씨도 그런 개인적인 취향, 자아의 공간이 필요했었다. 책방 19호실은 나를 단단하게 해주는 '혼자'인 공간이자, 용기 내서 세상으로 나아갈 '모두'의 공간이다. 책방에 오시는 분들도 그러했으면 하는 마음이 내포됐다.
“저의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 나처럼 이곳에서 편안하게 찾아와 책을 즐겨 읽고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현 씨는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뜻이 맞는 몇 분과 오프라인 독서 모임을 준비하고 있으며 글쓰기 모임은 6~8회 정도로 구성하여 한 번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말했다.
지현 씨 일상은 아이들을 챙기고 나서야 문을 연다. 빛이 잘 드는 주택가 담벼락에 화분을 옮기고 카페트 청소를 한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SNS에 “나 문 열었어요.”, “책 왔어요.” 등 인사를 끝내고 나의 책을 읽는다. 중간 중간 손님을 맞이하고 책을 추천하는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그녀만의 취향이자 행복한 삶을 즐기는 루틴이라 생각되었다.
책 한 권을 소개받았다. 조이스 박의 <내가 사랑한 시옷들(포르체, 2020)>이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세계의 명시 30편을 ‘사랑’, ‘사람’ 그리고 ‘시’라는 ‘시옷’들로 담았다. 단순히 시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쓴 시인의 생애와 작품 배경, 그 시에서 배울 수 있는 영어 표현까지 정리해서 알려준다. 시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들여다본다는 것은 번역자의 태도가 잘 전달되고, 마음의 빈 공간이 채워진 든든함이 있으며 특히 영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좋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지현 씨는 마지막으로 “주변의 동네책방은 많다. 하지만 책방 19호실은 선의와 줄 것이 있는 시그니처를 만들고 싶은 것이 지금의 목표이자 욕심으로 내재돼 있다.”라고 밝혔다.
나에게 책방이란? 19호실이다. 오롯이 책방지기의 삶을 통한 자유로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경남문화예술진흥원에서 알려드리는 소식지 웹진 Vol. 30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