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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리아 Dec 16. 2020

카톡에 손자 사진을 왜 올려?

내 기억 속 엄마는 우리 남매의 성장 과정에 아주 세심했다. 내가 급식이 맛없다고 하니 중고등학교 내내 도시락을 직접 싸주기도 했고, 지나가는 말로 과학이 너무 어려워서 수업시간이 괴롭다고 하니 노량진 단과 학원에 하나하나 전화를 하며 '우리 딸이 이러이러한데 어떤 수업을 들어야겠냐'며 일일이 상담을 받기도 했다. 오빠가 중학교 진학 후, 음악 시험에 자유 악기 연주가 있다는 걸 알고는 여름방학 동안 피아노 과외를 받도록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 남매에게 성적으로 다그치거나 스트레스를 준 기억은 한 번도 없다. 오빠나 나나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가져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텐데 그걸로 꾸지람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



엄마는 자녀를 위해 모든 걸 헌신하진 않았다. 중요하다면 중요한 고3 여름방학 때 엄마가 4박 5일 해외여행을 갔다. 엄마의 여행 멤버 자녀 중엔 내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어떻게 고3 딸들 두고 엄마들만 여행 갈 수 있냐'며 내게 불만을 토로했는데, 사실 난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엄마가 반찬을 다 해두고 가서 밥 챙겨 먹는 게 어렵지도 않았고, 방학 때라 별 문제가 없었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고3 시절 내내 아침마다 머리카락을 말려주고(아빠가 머리 빗겨주던 날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에 데려다주셨지만 사람 좋아하는 우리 아빠는 주말마다 친구분들을 집에 초대했다. 하필 고3 때 우리 집이 이사해서 집들이가 1년 내내 이어졌기 때문이다. 나 피곤할까 봐 아침마다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과는 별개로, 집에 고3이 있다고 무조건 고3에게 맞추진 않았다. 내가 손님들을 피해 독서실을 가거나 이어폰 끼고 공부해야 했다.



수능 시험을 코 앞에 둔 주말에 엄마가 “엄마 생일이라 삼촌들이 올 예정이니 그 날은 아침 일찍 독서실에 가라”고 했다. 난 화가 나서 “어떻게 수능 한 주 전에 집에 손님 부를 생각을 하냐. 달력 한 번 봐라. 고3 주말 내내 손님 안 왔던 날이 손에 꼽는다”라고 짜증을 냈다. 엄마는 그 날 삼촌들에게 모두 전화 걸어서 모임을 취소했다. 어쨌든 내가 의견을 말하면 엄마는 수용해주셨다.



최근에 깨달은 건 내가 우리 엄마를 '세심한 엄마'라고 생각하지만, '희생적인 엄마'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전자는 따뜻함으로 기억되지만, 후자는 슬픔으로 기억되는 거 같다. 난 우리 엄마가 희생적인 엄마가 아니라서 좋다.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항상 세심했던 한편, 엄마의 인생이 있었다.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시절도 있고,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엔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지만 그 나름대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여행 적금을 들어 친구분들과 비행기 타고 멀리 떠나곤 했다.



엄마랑 누워서 수다 떨던 어느 날, 엄마가 친구 분 이야기를 하며 "OO가 손주들 사진 카톡 프로필에 해놓는 사람들 이해 안 된다고 하더라"하길래 이유를 물었다. "60대에도 자기 삶이 있는 거지 날마다 손주 사진 바꿔 올리는 사람 보면 신기하대"라고 했다. (라고 하면서 엄마는 ‘올리는 거야 자기 마음이지 뭐..’라고 첨언함)


저 말을 하신 엄마 친구분은 나도 어릴 때부터 30년 넘게 봐서 잘 아는 아주머니다.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의 부탁으로 아들, 며느리, 손주가 아주머니네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고 있다. 아들 내외가 모시는 게 아니라 아주머니 내외가 도움 주는 셈이다. 다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에 대해 명확히 구분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내가 여행 갈 때나 모임 있는 날은 미리 공유할 테니, 무조건 둘 중 한 명이 연차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부분에 합의는 절대 없었다. 그 외에도 며느리에게 하시는 걸 보면 잔정은 없지만, ‘저 정도면 같이 살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무심한 듯 배려했다.


그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기억나는 오래전 장면이 있다. 아주머니가 자녀들 등교시킨 후 혼자 롯데월드에 간 것이다. 홀로 롯데월드 가는 본인을 위해 김밥을 싸기도 했다. 25년 전임을 감안하면 나름 파격적인 일이다. 아주머니의 딸이 본인도 따라가고 싶다고 했지만, 평일에 갈 거라며 학교 보내고 혼자 가셨다.


내가 본 아주머니도 평소 세심한 엄마는 맞지만, 희생적인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의 친구분들도 희생적인 엄마가 아니라서 좋다.



엄마의 카톡 프로필 사진엔 뭐가 있나 하나하나 넘겨보니 아빠랑 바다 보러 간 사진, 친구 분들이랑 간 유럽 사진 등이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급할 때마다 다른 일 제쳐두고 육아에 도움을 주신다. 멀리 사는 손자가 보고 싶어 사진 보내라고 종종 채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의 프로필 사진까지 손자가 침범하진 않는다.

앞으로도 엄마 카톡에 손자 사진이 없었으면 좋겠다. 손자 사진 말고, 엄마 삶의 다채로운 기록이 엄마의 프로필 사진이길 바란다.


내가 아이를 재우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친구랑 수다 떠는 것처럼, 엄마의 인생도 지금처럼 우정, 여행, 취미로 다양했으면 좋겠다.


희생적이진 않지만 세심한 엄마, 나도 우리 엄마처럼 ‘희생’ 대신 ‘따뜻함’으로 기억되고 싶다.





* 손자 사진 대신 엄마의 여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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