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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리아 Nov 17. 2020

어린 시절 살던 그 집

내가 네 살 때 부모님이 첫 집으로 주택을 샀다. 친구 분들에 비해 조금 빨리 내 집 마련을 하셨던 터라 집을 구경하러 친구분들이 자주 놀러 오셨다.


엄마 친구 - "이 집은 몇 평이야?"

엄마 - "OO평이야"

엄마 친구 - "더 커 보이네. 실 평수야?"


오는 분들 대부분 똑같이 저 순서로 대화가 오갔다.

그래서 나는 친구 집에 가면 "안녕하세요" 한 후 저 말을 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현관을 들어서면서 친구한테 인사하고

"이 집은 몇 평이야?" 물었다. 그게 인사인 줄 알았던 거다.

친구가 "모르겠는데? 엄마한테 물어보고 올게"라고 하더니 몇 평이라고 대답해줬다.

안타깝게도 나는 거기서 또 물었다. "더 커 보이네. 실 평수야?" (뭔지도 모르면서ㅠㅠ)

"잠깐만. 엄마한테 다시 물어볼게"하고 와서 나에게 또 대답했다.


내 인생의 흑역사다........




내게 흑역사 인사법을 심어준 집이지만, 네 살 때부터 살던 그 집을 생각하면 내 어린 시절과 함께 젊은 부모님이 생각난다. 내 어린 시절도 그립지만, 젊은 엄마 아빠가 그리워진다.


6학년이던 오빠 친구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손님이 올 때 펴는 10인용 상을 꺼내 엄마는 맛있는 밥을 해주셨다. 열세 살 남자애들이 매일매일 대여섯 명 우르르 몰려오면 귀찮을만도한데, 엄마는 매일 밥과 간식을 내줬다.


오빠 친구들 중에는 어머니와 따로 살던 친구도 있고, 아버지가 안 계셔 어머니가 내내 일을 하시느라 집에 안 계셨던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하교 후에 늘 밥과 간식을 해주는 우리 집에 왔던 거 같다.


밥을 먹고 나면 아빠는 대문에 농구골대를 설치해줬다. 마당은 작아서 농구를 할 수 없으니 집 앞 골목에서 할 수 있게 대문 위에 만들어준 거였다.

커다랗고 튼튼한 나무판자에 못질해서 농구골대를 달아주면 오빠 친구들은 오후 내내 땀 흘리며 농구를 하고 놀았다. 다 놀고나서 골대를 철수하지 않으면 모르는 동네 청년들이 농구공을 가지고 와서 밤새 농구를 하니, 오빠 친구들이 놀고 나면 다시 대문 위로 올라가 분리해야 했다.

그 수고로운 일을 아빠가 매번 해주셨다.


농구를 하고 저녁이 되면 엄마가 차려주신 저녁을 먹고 집에 갔다.


오빠 친구들이 집에서 밥이나 간식을 먹고 가면 오빠 친구 어머니께 전화가 오기도 했다. '만들어주신 미니 햄버거가 너무 맛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냐'같은 것들이었다.


1년 내내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던 한 오빠 친구네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졸업식날(당시 국민학교) 그 간 신세 많았다며 델몬트 주스를 대문 앞에다 두고 가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 아빠가 대단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들 친구 네댓 명의 밥과 간식을 차려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 같다.


어느 주말 역시 오빠 친구들이와서 저녁을 먹는데, 우리 집에 오신 숙모가 그 광경을 보더니 '아휴 저렇게 잘 먹는 애들이 매일 와서 밥 먹으면 그 돈도 무시 못하겠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당시 코스트코의 전신인 '프라이스클럽'이 있었는데(무려 25년 전...), 프라이스클럽에서 잔뜩 장을 봐오면 오빠 친구들이 하루 만에 다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엄마 아빠의 경제적 리즈시절이기도 하다. 엄마는 가끔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땐 형편이 좋았으니까. 지금 같았으면 그렇게까지 챙길 수 있었으려나'라고 말하곤 했다. 곳간에서 인심 나는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매일 들이닥치는 남자아이들 4~5명의 식사와 간식을 챙기는 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였을 거다.


지금도 오빠 친구들은 '너희 어머니가 코렐 식기에 담아주시던 맛있는 밥이 생각난다'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25년 전 시절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부부동반 모임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새언니가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니 엄마가 흐뭇해하셨다. 아들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했다 하더라도 하루 이틀 아니고 힘들긴 했을 텐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머니 참 좋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뿌듯한 거 같았다.



우리 남매의 유년시절이 담긴 그 추억의 주택을 아빠가 팔고 이사를 추진했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이 엄청나게 올라서 엄마는 오랜 시간 정말 속상해했다. 그 집 팔고 더 많은 돈을 보태 이사를 왔는데, 예전 집만 엄청나게 올라버렸기 때문이다. 엄마가 너무 속상해하니 나도 그 주택 앞을 걸어가기가 싫어서 잘 안 갔다. 그 집을 지나가면 배가 아팠다.


그런데 오빠 친구의 말을 전해 들은 엄마가 그 이야기를 듣는 시간만큼은 ‘팔고 나니 배 아픈 집'보다는 '그 집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거 같았다.

나도 오빠 친구의 말을 전해 들으니 그 집에서의 기억을 추억하는 자체만으로도 아련하고 애틋했다.


다음에 부모님 댁에 가면 그 집 앞을 산책해야지. 그때는 나도 배 아파하지 않고, 마음 넉넉했던 엄마 아빠의 젊은 시절과 시끌벅적했던 우리 집을 추억해야겠다. 엄마 아빠의 친구분들, 오빠 친구들, 내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의 사랑방 같았던 북적북적했던 우리 집.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지금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도 좋은 추억이 많은 집이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엄마아빠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서툴지만 따뜻했던 엄마아빠>를 쓰는 중입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oj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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