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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리아 Jan 18. 2021

엄마 밥을 무전취식했다

"집에서 차려준 밥 먹고 맛있다고 안 하면 무전취식이야. 식당에서 밥 먹고 돈 안 내고 가는 거랑 똑같다고"

최근에 이런 대사를 어디선가 봤다. (책인지 웹툰인지 가물가물)


그렇다면 우리 아빠는 식당에서 밥 먹고 돈을 아주 많이 낸 사람에 속하겠다.

아빠의 리액션은 엄마가 요리하고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진짜 맛있겠다. 엄마 요리 기가 막히지 않냐?'


잔치국수를 좋아하는 아빠 때문에 엄마는 국수를 순식간에 만든다. 난 엄마 잔치국수에 계란지단이 올라간 걸 좋아한다. 평소에 두 분이 드실 때에는 지단 없이 먹는다던데, 내가 간 날이면 꼭 지단을 올려주신다. 엄마가 국수를 끓일 동안 아빠는 옆에서 지단을 부친다. 지단이 얇게 채 썰어있으면 엄마가 한 거고, 조금 굵게 채 썰어 있으면 아빠가 한 거다.


국수를 한 입 먹으면 아빠의 본격 리액션이 시작된다.

"OO(엄마 이름)가 한 국수는 어디 가서 돈 주고 사 먹을래도 사 먹을 수가 없어"

"OO가 해준 거 먹다가 식당 가면 먹어도 먹은 거 같지가 않아"


엄마는 요리를 잘하기도 하고, 뚝딱 해내는 편이다. 그리고 가족들이 먹고 싶다고 할 때마다 재료만 있으면 휘리릭 한다.


엄마는 아빠의 리액션을 좋아하지 않는다. 매번 아빠의 리액션이 시작되면 엄마는 "아휴. 조용히 드셔 그냥. 너네 아빠는 오버가 너무 심하다"라고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맛있다거나 잘 먹었다는 말이 없었다면 엄마가 그 많은 요리를 기꺼이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매 끼 요리 하더라도 보람은 없었을 거 같다.




중3 어느 날, 도시락에 엄마가 계란말이를 싸주셨다. 그 날 친구도 계란말이를 싸왔는데 엄마 계란말이보다 도톰해서 식감이 좋고 맛있었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엄마. 친구가 계란말이 싸왔는데 두껍게 하니까 맛있었어. 나도 그렇게 싸줘"라고 하니 엄마가 알겠다고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아빠가 "엄마가 싸준 계란말이도 맛있었는데, 두꺼운 계란말이도 먹어보고 싶다고 해야지. 엄마가 고생해서 싸준 건데"라고 하셨다.


그땐 별생각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너무나 맞는 말이다. 학교 급식이 맛없다고 하니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난 '맛있다'는 말없이 무전취식하고 있었던 거다.


사실 최근까지도 무전취식했다. 엄마 음식은 백발백중 맛있기 때문에 그동안은 딱히 맛있다고 말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었다. 당연한 사실을 뭐하러 말하나 이런 마음이었다.


나도 예전엔 아빠의 리액션이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야 그 리액션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나도 엄마 밥을 먹으면 맛있다고 말한다. '이거 맛있다'라고만 말해도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돈다. 무전취식하던 사람이 돈을 내서 그런 거 같다.



엄마의 요리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무전취식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속으로만 고맙다고 생각해봤자 나만 알 뿐이다. 표현해야 고마움이 전해진다는 걸 아빠 덕분에 알았다.




엄마아빠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서툴지만 따뜻했던 엄마아빠>를 쓰는 중입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oj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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