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리아 Mar 31. 2020

일어나자마자 단소 연주했던 날

학창 시절 내내, 엄마는 전쟁 치르듯 아침잠 많은 나를 깨우셨다. 그중 생각나는 웃픈 일화 하나.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엄마가 등짝을 때리며 깨워 겨우겨우 눈을 뜨고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있는데 엄마가 빨리 일어나 씻으라 했다. 이불 밖으로 나오기 너무너무 싫어서 꿈틀대고 있는데, 이불 옆에 있는 단소가 보였다. 이불 밖으로 일어나기 싫은 나는 뜬금포로 단소를 불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그걸 불고 있어. 빨리 씻기나 " 엄마가 한소리 하니,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음악 선생님 진짜 무서운데 단소   불면 혼날  같아. 연습  해야겠어" 아무말대잔치를 했다. 아무 이유 없었다. 그냥 이불에서 나가기 싫었고, 옆에 단소가 보였을 뿐이다. 단소 좀 불다 보니 잠이 깨길래 밥 먹고 씻고 학교로 갔다.


학교 가서 애들이랑 놀다가 종이 울려 자리에 앉았고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런데  수업을 시작하려던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며 누군가에게 인사를 했다. 창문을 봤는데, 우리 엄마였다. 영탁의 노래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엄마가 왜 거기서 나와'



엄마는 선생님에게 단소를 건넸다. 선생님은 의아한 듯 시간표를 쳐다봤다. 당연히 시간표에는 음악이 없다.

엄마는 내가 아침 댓바람부터 단소 연습을 하니 그 날 음악 시간이 있는 줄 알았던 거다. 내가 '음악 선생님이 엄청 무서워서 단소 연습을 해야 한다'며 눈뜨자마자 단소를 불러댔으니 착각할만하다.


음악 선생님 무섭다 해놓고 단소를  가져갔으니 엄마는 내가 혼날까  깜짝 놀라 단소를 들고 학교까지 뛰어온 것이었다. 1교시 시작 전에 오려고 엄청 뛰어오셨을 거 같다. 우리 집과 학교는 15분 정도 거리였는데, 아마 5분 내에 오시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선생님한테 단소를 주고 집에 갔고, 선생님은 나에게 '엄마가 착각하셨다보다'며 단소를 주셨다. 난 뭔가 들킨 마음에 엄청 부끄러웠다. 선생님이랑 친구들은 우리 엄마가 시간표를 착각한 해프닝 정도로 생각했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 혼자 민망한 마음에 전전긍긍했다.


내가 그 날 집에 가서 엄마한테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은 음악 시간 아니었다고 말했으려나? 아니면 모르는 척 지나갔으려나?


이 기억을 떠올리다가 엄마는 그때 몇 살이었나 헤아려보니 지금의 나보다 딱 세 살 많았다. 20년 이상 훌쩍 지난 일이니 그 당시만 해도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시절이었다. 특히나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할아버지 선생님(당시 58세였는데, 그때는 58세면 다들 할아버지라 불렀다)이라 엄마는 단소를 건네드리면서 엄청 어려워하셨을 게 분명하다.


내가 준비물 놓고 간 것이니 혼나든 말든 놔뒀어도 되지만, 학교까지 헐레벌떡 뛰어왔을 엄마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하다. 와중에 수업이 시작해버려 나한테 직접 주지 못하고 선생님한테 드리면서 엄마는 거울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출발한 걸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너무나 어려운 존재였으니까.


"엄마 미안, 그때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단소  거였어"라고 엄마한테 말하면 엄마는 뭐라고 할까?

"하여튼 너는 어릴 때부터 진상 기운이 있었어"라고 하실  같다.



이제 나는 단소를 가져다줬던 엄마랑 비슷한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엄마아빠에게 민폐 끼치며 살고 있다. 특히 요즘은 민폐의 최고조다. 코로나 피해서 부모님 집에 왔다가 한 달 넘게 살고 있다. 게다가 오늘 아이 개학이 무기한 연기되어 언제까지 있게 될지 모르겠다.


엄마가 힘들어 보여서 우리 집으로 가려했는데 막상 못 가게 하신다. 집에 가봤자 아이 밥도 대충 먹이고 맨날 애랑 싸우고 있는 거 안 봐도 뻔하다며 개학할 때까지 있다 가라 하신다.


난 이미 여섯 살 아이가 있는 학부형인데, 엄마 눈엔 단소 두고 가서 버선발로 학교 오게 만들었던 열두 살인 거 같다.


그래도 엄마 덕분에 무기한 개학 연기된 지금도 육아며 일이며  편히   있어서 감사하다. 요즘 외부 일정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 오랜만에 미팅 다녀오니 너무 피곤했다.  먹으라는 엄마 말에 ‘라면이나 먹으려고했더니,  갈아입는 동안 엄마는 벌써 라면 물을 끓이고 있었다. 지금은 내일 먹을 수제비 반죽을 하고 계신다. 내가 수제비를 좋아해서다.


결혼 후 부모님 집에 이렇게 오래 지내보는 게 처음이다. 아침 먹으라고 엄마가 깨우면 조금 더 자고 싶어서 시간끌기용 아무말대잔치를 하다보니 단소 불던 아침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엄마아빠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서툴지만 따뜻했던 엄마아빠>를 쓰는 중입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ojhy

이전 06화 엄마 밥을 무전취식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