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 아빠는 빨간 날 쉬지 않았지만 여름방학만큼은 가족과 함께 여러 군데 여행을 갔다.
가평 계곡에서 우연히 아빠의 군 시절 선임을 만났던 다섯 살 여름, 하조대에서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던 열한 살 여름, 화천에서 다슬기 잡던 열두 살 여름 등 내겐 그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의 옛 동료들과 함께 갔던 화천에서는 아주 투박한 아저씨들 손길로 보물 찾기를 준비해주셨다.
계곡 근처 돌멩이 사이사이로 '특 당첨', '당첨', '꽝'이 쓰인 종이를 숨겨두면 아이들 여덟 명이 정신없이 보물을 찾으러 다녔다. ‘난 꽝만 두 개야' 외치는 내게 아저씨들은 '꽝 두 개면 특 당첨'이라며 분홍색 필통을 쥐어주셨다.
평소 자녀를 챙기는 건 엄마들 몫이었으니, 아저씨들(아빠 포함)은 선물로 어떤 걸 사야 할지 몰랐던 거 같다.
내가 받은 분홍색 필통은 당시 열한 살인 내가 봐도 ‘왜 이런 걸 사셨지. 이런 모양을 아직도 파나?’ 싶을 정도로 촌스러운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아빠들이 나름 신경 써서 준비한 이벤트라는 걸 알았다.
다슬기 잡던 화천 계곡을 떠올리면 하늘색 텐트와 함께, 촌스러운 분홍색 필통이 떠오른다.
열두 살 여름, 동네 이웃들과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는데 아빠 거래처에 급한 일이 생겨 못 가게 됐다. 부모님은 우리 가족이 내기로 했던 회비를 그대로 낼 테니, 우리 남매를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이웃 가족들 틈에 속초 콘도에 가서 밤새 원카드 하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들 잘 챙겨주셔서 위축되는 거 없이 재밌게 놀았다. 아침이 되면 옆집 아주머니께서 내 머리를 묶어주시고 밥을 챙겨주셨고, 내내 옆집 아이들과 수영하고 놀았다.
아빠 친구들 가족과 함께 했던 하조대 모래사장에서 달리기 시합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차는 엄청나게 밀리고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던 25년 전 여름을 엄마도 종종 이야기한다.
중학교 이후엔 여름휴가 기억이 별로 없다. 가족 여름휴가가 재개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아들이 생기고 나서다.
남편이 여름에 바빠서 우리 가족은 늘 늦가을에 휴가를 간다. 여름에 혼자서 애 데리고 여행 가는 건 엄두가 안 났는데, 올여름에 엄마아빠 그리고 나랑 아들 이렇게 넷이 여행을 가게 됐다.
다 같이 시간 맞추기 힘드니 당일치기로 다녀왔는데, 아빠는 '1박 2일 같은 당일치기'를 해야 한다며 새벽 다섯 시부터 기상을 외치셨다. 누룽지라도 먹고 출발하자 하니 일단 무조건 빨리 출발해야 한다며 채근해 우리는 해가 뜨기도 전에 아빠 차를 타고 강원도로 향했다. 그 날 비가 엄청나게 와서 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아빠는 마음먹은 김에 가야 여행하게 된다며 강행했다.
도착하니 아침 식사할 시간이라 든든하게 두부집에서 배를 채우고, 설악산 케이블카로 하루를 열었다. 비바람이 부는 사이에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속초중앙시장 가서 킹크랩을 사 와서 해변에 자리를 빌려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선 아빠는 손자를 데리고 아주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그리고 지겨울 정도로 사진을 찍으셨다.
실컷 물놀이를 하고 나니 나는 그제야 '아참. 우리 당일치기라서 숙소도 없는데 애 목욕을 어디서 시키지?' 생각했는데, 아빠가 트렁크에서 페트병을 꺼내신다. 페트병 네댓 개에 물을 가득 담아오셨던 거다. 그 물로 손자 손발을 씻기고 몸을 씻기고 준비해온 수건으로 몸을 얼른 닦아 차에 태우셨다.
요즘에야 놀러 가면 리조트에서 수영하고 편히 쉬니 이렇게 고생할 일이 없는데, 우리 어릴 때 엄마아빠가 이렇게나 미리 세심하게 준비해서 우리가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었구나 싶었다.
실컷 놀고 나서 아빠한테 고성에 가보고 싶은 카페가 있다고 하니 카페 앞까지 데려다주셨다. 아빠는 손자랑 차에서 낮잠 잘 테니 엄마랑 둘이서 조용히 커피 마시고 오라 하셨다. 덕분에 좋아하는 카페에서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빠의 진두지휘 아래 속초, 양양, 고성을 하루 동안 알차게 돌았다.
그 날,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는 내내 어린 시절의 여름휴가 모습이 겹쳐졌다.
초등학생 오빠가 아빠 옆 자리 앉아 큰 지도를 펼치고 아빠한테 길을 안내하던 모습, 깎아온 과일을 차에서 나눠주던 엄마, 여행지에 도착하면 아빠가 땀 흘리며 텐트를 치던 모습, 커다란 에어보트에 오빠랑 나를 태우고 열심히 노를 젓던 젊은 아빠 모습이 떠오른다.
주말에 우리 남매랑 많은 시간 함께 하지 못했던 아빠는 기회 될 때마다 롯데월드에 데리고 가주셨다. 롯데월드 입장할 때마다 '혹시라도 길 잃어버리면 이 시계탑 앞에서 만나는 거야'라고 신신당부하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롯데월드 시계탑을 보면 '잃어버리면 만나는 장소'처럼 생각된다.
캐리비안베이가 생기자마자 친구 집에 있던 나를 급히 차로 데리러 와 용인으로 향했던 날도 기억난다. 난 그 날 친구 집에서 자기로 한 날이었는데, 아마도 아빠 일정상 그때 아니면 여름방학 때 놀러 갈 수 없어서 그랬던 거 같다.
내가 막상 엄마가 되고 보니 그저 평범하게 자란 내 어린 시절엔 얼마나 많은 엄마 아빠의 세심함이 깃들었을까를 헤아려보게 된다. 내 아들을 나보다는 더 긍정적이고, 나보다는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데, 그러려면 나는 얼마나 더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심하게 챙겨야 하는 건지를 생각해보면 아득해지기도 한다.
아빠는 '지금 부지런히 데리고 다녀야지. 이제 몇 년 지나면 할아버지랑 여행 간다고 하겠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래서 중학교 이후로 가족 휴가 없었던 거였나?
그저 평범했다고 생각되는 내 유년시절은 엄마아빠 입장에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최선의 노력들로 빚어진 시간들이었다. 나랑 오빠가 계곡에서 다슬기 잡고 노는 동안 화천시장 문방구에 가서 촌스러운 필통을 골랐을 아빠의 젊은 여름 날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엄마아빠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서툴지만 따뜻했던 엄마아빠>를 쓰는 중입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oj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