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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Oct 23. 2020

서울 야상곡 Op.123, 창경궁 (빛이 그리는 시간)

트래비(Travie) 아카데미 7기 출사 이야기

쇼팽이 밤의 분위기를 녹턴(nocturne)으로 담아냈으니,
밤의 창경궁은 서울 녹턴 Op.123이라 이름 지으며 시작하는 야간 출사 이야기.
(창경궁은 사적 제123호이다.)




축전 입구인 사다리꼴 통로를 빠져나오니 빛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눈의 고장이었다’를 쓸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창경궁에 처음 가보는 출사 멤버가 꽤 많아 낮에 미리 창경궁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하루 전, 야간개장에 대해 검색해 보다가 궁중문화축전 소식을 접했다. 창경궁에서는 '빛이 그리는 시간'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데 이미 사전에 예매가 끝난 상태였다. 이 프로그램을 위한 장치가 창경궁 곳곳에서 보였다. 춘광지에 깔려 있던 (보건 교사 안은영에 아는 젤리를 닮은) 형광 자갈, 산책로 안팎으로 설치된 조명 장치, 스크린으로 쓰일 천막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빛이 '그리는' 시간이란 프로그램 제목에서부터 조명과 영상을 통해 빛이 새로운 무언가를 그려낼 거라고 짐작했다. 춘당지 앞 자갈은 실제 발광 여부를 몰라서 별 효과 없이 너저분하게 뿌려 놓은 ‘예레기’(예쁜 쓰레기)일지 축전에 또 다른 빛을 선사할지는 밤이 되어야만 알 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창경궁을 누비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창경궁을 빠져나왔다. 창경궁 야간개장은 상시 개방이라 계속 머물러 있어도 됐지만 한복을 반납하기도 해야 하고(이 날 인물 사진 촬영 연습도 할 겸 몇몇 멤버가 한복을 빌려 입고 왔었다.) 저녁도 먹어야 해서 해가 지고 나서 다시 궁으로 들어오기로 했다. 나오던 중 궁중문화축전에 관한 입간판에 눈이 번쩍 뜨이는 안내 문구가 있었다. '빛이 그리는 시간' 현장접수. 2회차(19:20)와 4회차(20:00). 


 현장접수를 정확히 어떻게 하는지 나가기 전 안내데스크에 문의를 했다. 궁중문화축전은 주최 측이 달라 창경궁 입장 후 현장접수처에서 문의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정리를 하자면,     

 

 사전 예매를 한 경우: 창경궁 표(천 원)를 사고 입장 후 시간에 맞춰 빛이 그리는 시간 입구에 가면 된다.   
 현장접수를 할 경우: 25명에 한해 2회차(19:20), 4회차(20:00)에만 가능. 마찬가지로 창경궁 표를 사서 입장 후 춘당지 방향으로 진입하는 산책로 입구 즈음에 현장 접수처가 있다.      
 * 여기에 깨알 팁을 하나 더하자면 창경궁은 교통카드로 입장이 가능하다.


 

 저녁까지 먹고 느긋하게 7시가 좀 안 돼서 창경궁으로 돌아왔다. 바로 현장접수처로 가서 줄을 섰는데 웬걸 일행은 여섯 명, 남은 표는 단 네 장이었다. 가위바위보해야 하나, 눈치 게임 해야 하나... 아님 쿨하게 다 같이 축전은 포기냐 궁리하던 찰나 낭보가 전해졌다. 앞에 서 있던 두 명은 이미 사전 예매를 한 것. 일이 맞아 떨어지려면 이렇게도 맞아 떨어지는 구나. 4+2=6. 인원수에 딱 맞게 접수를 했으니 현장접수도 마감되었다. 5분 전에 입구로 오라했으니 1시간여의 시간동안은 창경궁 야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현장접수는 18시30분부터 한다고 들었는데, 7시 정도에 간 우리는 저녁 8시인 4회차로 접수하였다. 코로나 방역 단계가 완화되고 단풍이 들고 하면 더 금방 마감될지도 모르겠다.)


4회차 입장 시간 전까지는 춘당지 쪽을 제외한 다른 곳을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이 날도 삼각대로 고군분투하며 야경 촬영을...
운이 좋게 구한 빛이 그리는 시간 티켓.


 


 시간이 되어 ‘빛이 그리는 시간’ 입구로 갔다. 입구에서부터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감이 마구 솟구쳤다. 나무 사이로 사다리꼴의 통로를 레이저로 만들어 두었는데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 가는 문처럼 느껴졌다. 거리두기 때문에 입장은 띄엄띄엄 진행되었다. 그러다보니 입장한 시각은 거의 8시 10분. 마스크를 계속 써라, 사진은 마음껏 찍으라는 배우 이선균의 목소리로 녹음된 안내방송도 처음엔 감탄했지만 10분 내내 계속 듣다보니 살짝 물리기도 했다.      

 

 새 차원으로 가는 사다리꼴 통로를 빠져나오니 빛의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눈의 고장이었다’라고 쓸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원래 산책로와 수풀의 경관을 헤치지 않으면서 그 주변을 온통 빛으로 메꾸었다. 도쿠시마나 아비뇽 교황청에서의 루미나리에의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듯한, 빛을 그리는 시간 축전의 입구.
정원의 경관을 헤치지 않으면서 빛과 색으로 창경궁을 물들인다.
낮에 본 형광 자갈은 '예레기'가 아니었다. 반짝 반짝 제 역할을 다 하는 자갈.
빛이 그리는 시간이란 타이틀이 너무나도 와닿는 창경궁 밤 산책.
누군가 만들어 놓은 하트.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들.



 춘광지까지 더 들어가니 빛의 고장 한 가운데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낮에 본 형광 자갈이 각자의 색을 뽐내고 있던 것. ‘이런 거 문화재에다 막 뿌려 놓아도 되는 거야?’라고 한 농담이 머쓱해질 만큼 예뻤다. 구불거리며 춘광지 방향으로 좁아지는 길을 자세를 낮춰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 북유럽 하늘의 오로라를 바닥에 깔아 둔 듯했다. 그 길의 끝에는 또 다른 장관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레이저쇼. 낮에 날씨가 흐려 호수에 비친 반영이 조금 아쉬웠는데 그 아쉬움까지 달래주는 듯 색색의 레이저가 호수 위에 흩뿌려졌다. 



춘당지 위로 흩뿌려지는 빛.



 레이저쇼를 보고 낮에 걸었던 춘광지를 둘러 난 산책로를 따라 대온실까지 걸었다. 대온실 앞에서 단체사진까지 한 방 찍고 나니 안내원이 폐장 시간을 알린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번 빛의 고장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마지막 회차가 끝나면 춘당지를 통해 나가는 길도 막아 놓는다고... 이미 사전 예매가 매진이라 축전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걸 생각하면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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