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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고도 강렬한 색

단상(14)

by Fernweh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을 피로하게 만드는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이 있다. 혹은 포토샵 '채도' 조정 칸에 최댓값을 넣으면 보이는 강렬한 색도 있고. 그런데, 이 둘에 비하자면 눈에 띄지 않던 하나의 색이 있었으니...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방심한 찰나 강렬함을 곱절로 받아내며 '강렬하고 강렬한' 색이 되어 버린 색.


어색


이게 또 뭔 해괴망측한 말장난인가 싶지만,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에 느낀 어색한 기류가 너무나도 강렬해서 이런 말장난질을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얼마나 강렬했으면 무색의 단어를 색상에 빗대어 표현했겠는가. 어색이란 색채에 흠씬 두들겨 맞듯 압도된 상황은 아래와 같다.


집에서 마을버스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 갈 일이 생겨 폭염을 무릅쓰고 나온 날, 버스를 탔는데 2인 좌석 중 통로 쪽 자리만 딱 한 자리 남아 있었다. 터덜터덜 자리를 향해 가는데 옆에 앉아 있던 분의 낯이 굉장히 눈에 익었다. 불현듯 다니는 헬스장에서 본 사람이란 게 떠올랐다. 친구도, 동네 이웃도 아닌, 그저 헬스장에 가는 시간이 비슷해 얼굴을 익힌... 그러니까 굳이 관계를 정리해 보자면 '얼굴은 아는데 그렇다고 아는 척을 하기는 애매한 사이'인 분이었다.


(남들은 부인하지만) 낯을 굉장히 심하게 가린다. 헬스장에서 이틀에 한 번꼴로 본다는 이유만으로 살갑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못 된다는 말이다. 그저 헬스장 입구에서 오가며 스친 정도가 아니고 이용 시간이 비슷해 1시간 가까이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운동하는 사이인데도, 게다가 외관상으로(?)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임에도 선뜻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함께 운동한다고 했으나 헬스는 엄연히 개인 운동이라 어떤 라포를 형성할 기회가 없기도 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늘 스치기만 하던 얼굴만 아는 사람과 버스에서 나란히 앉게 될 줄을.


기왕 이렇게 된 거 먼저 인사하자, 라고 마음먹을 수 없었던 건 지난 양양 여행의 소소한(?) 부상과 거리두기 4단계 격상을 핑계로 2주 가까이 헬스장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전에 헬스장에서 봤다고 해도 아는 척하기 애매한 상황이니 2주의 공백엔 섣불리 인사했다가 '뉘신지...'하고 마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만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어색한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체감상) 느릿느릿 굴러가던 버스가 끝끝내 내가 내려 할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 짧은 찰나에 날 압도한 건 채도도 전혀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미칠듯이 강렬한 색, '어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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