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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ul 16. 2021

강렬하고도 강렬한 색

단상(14)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을 피로하게 만드는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이 있다. 혹은 포토샵 '채도' 조정 칸에 최댓값을 넣으면 보이는 강렬한 색도 있고. 그런데, 이 둘에 비하자면 눈에 띄지 않던 하나의 색이 있었으니...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방심한 찰나 강렬함을 곱절로 받아내며 '강렬하고 강렬한' 색이 되어 버린 색. 


어색


 이게 또 뭔 해괴망측한 말장난인가 싶지만,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에 느낀 어색한 기류가 너무나도 강렬해서 이런 말장난질을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얼마나 강렬했으면 무색의 단어를 색상에 빗대어 표현했겠는가. 어색이란 색채에 흠씬 두들겨 맞듯 압도된 상황은 아래와 같다.


 집에서 마을버스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 갈 일이 생겨 폭염을 무릅쓰고 나온 날, 버스를 탔는데 2인 좌석 중 통로 쪽 자리만 딱 한 자리 남아 있었다. 터덜터덜 자리를 향해 가는데 옆에 앉아 있던 분의 낯이 굉장히 눈에 익었다. 불현듯 다니는 헬스장에서 본 사람이란 게 떠올랐다. 친구도, 동네 이웃도 아닌, 그저 헬스장에 가는 시간이 비슷해 얼굴을 익힌... 그러니까 굳이 관계를 정리해 보자면 '얼굴은 아는데 그렇다고 아는 척을 하기는 애매한 사이'인 분이었다. 


 (남들은 부인하지만) 난 낯을 굉장히 심하게 가린다. 헬스장에서 이틀에 한 번꼴로 본다는 이유만으로 살갑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못 된다는 말이다. 그저 헬스장 입구에서 오가며 스친 정도가 아니고 이용 시간이 비슷해 1시간 가까이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운동하는 사이인데도, 게다가 외관상으로(?)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임에도 선뜻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함께 운동한다고 했으나 헬스는 엄연히 개인 운동이라 어떤 라포를 형성할 기회가 없기도 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늘 스치기만 하던 얼굴만 아는 사람과 버스에서 나란히 앉게 될 줄을. 


 기왕 이렇게 된 거 먼저 인사하자, 라고 마음먹을 수 없었던 건 지난 양양 여행의 소소한(?) 부상과 거리두기 4단계 격상을 핑계로 2주 가까이 헬스장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전에 헬스장에서 봤다고 해도 아는 척하기 애매한 상황이니 2주의 공백엔 섣불리 인사했다가 '뉘신지...'하고 마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만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어색한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체감상) 느릿느릿 굴러가던 버스가 끝끝내 내가 내려 할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 짧은 찰나에 날 압도한 건 채도도 전혀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미칠듯이 강렬한 색, '어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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