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욕고불만 07화

(4) MINCE / MERDE

욕마저 고상하다는 불어를 만나다(4)

by Fernweh

MINCE / MERDE [망쓰 / 메흐드]


파리. ‘파’자로 시작하니 마냥 파라다이일 것 같은. 그런데 하필 많고 많은 천국 중에 개똥 천국일 건 뭐람. 그만큼 길거리에 개똥이 널려있으니 발밑을 조심하라는, 가이드북에서 한 번쯤 봤음직 한 당부사항은 좀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파리의 거리를 아무리 좋게 봐줘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거리를 걷다 보면 심심찮게 보기도 했던 게 바로 개똥이니까. 그래서 이번 장은 개똥 밟은 썰을 풀며 시작해 보련다.

괜한 동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먼저 밝힌다. 개똥을 밟은 건 내가 아니고 내 앞을 걸어가던 행인이었다. (휴)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뒤에서 걷고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격분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똥! 똥! 피똥(putain)! 똥!


뒷사람에게 여기 개똥 있다고 알리려고 똥똥 거리는 건 아닐 터. 똥 밟은 걸 자랑하고 싶다면 차라리 떵떵거려야 자랑하는 뉘앙스가 잘 녹아들지 않을까. 이 말장난 같은 생각을 하며 말장난 같은 광경을 보던 난 기어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가 정말로 ‘똥’을 외치려 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하필 (혹은 마침) 그가 외친 단어가 우리말 뜻으로는 ‘똥’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엄청나게 새로운,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영어에서 ‘젠장’, ‘제기랄’을 의미하는 비속어를 뱉을 때도 직역하면 ‘똥똥’거리는 거니까. (“Shit!”) 프랑스어 단어 ‘Merde’도 같은 맥락이다. 실생활에서는 ‘똥’이란 원래 뜻으로 쓰이는 경우보다 속된 감탄사로 쓰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꼭 ‘압도적’이란 수식어를 달아야 할 만큼 진짜로 많이 쓰인다.


“ ‘제기랄’, ‘빌어먹을’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프랑스인들이 봉주르 만큼 많이 쓰는 말이다. ”

- 몽 카페/ 신유진/ 시간의 흐름


인사말보다 많이 쓰인다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문지방에 발가락이 찧어도, 그 발가락 위에 핸드폰을 떨어뜨려도, 그 핸드폰 약정이 22개월이나 남아있는 걸 깨달을 때도, 그 충격에 멍해져서 타야 할 버스를 놓쳐도 프랑스인 열 중 아홉은 ‘Merde’하며 똥을 부르짖는다. 다른 게 아니라 똥을 밟고서 똥을 부르짖는 장면을 봤으니 웃음이 터질 수밖에. 같은 상황에서 우리 입에서 비속어가 나올 때면 ‘젠장’보다는 시바견(순화를 위해 귀여운 시바견이라 칭했다)을 먼저 찾는다. 차마 두 번째 음절까지는 가지 못하고 ‘이런 씨...’하고 말지언정 말이다. 물론 프랑스인도 ‘putain’도 내뱉긴 하지만, 확실히 ‘Merde’가 더 먼저 나오는 듯하다. 피똥은 강렬한 매운맛을 봤을 때나 나오는 것과 같나 보다. (자꾸만 변 얘기를 해서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으실 테니 이쯤에서 양해의 말씀을...꾸벅)


어휘 수로만 따지자면 프랑스어 어휘보다 우리말 어휘가 더 많다고 들은 적이 있다. 개중에는 불어보다 훨씬 세분된 비속어도 일부 이바지를 할 터. ‘Merde’를 강도를 조절하며 표현해보자면 ‘젠장’, ‘제기랄’부터 ‘우라질’, ‘염병할’, ‘지랄 맞은’까지 상당히 다양해진다. 그렇기에 꽤 심각한 상황에선 심한 욕으로도 들릴 수 있는 욕이기도 하...

...나 욕의 다양성만큼이나 그 수위도 우리말이 앞선다. 표제에 나란히 소개된 ‘Mince’도 ‘제길’, 같은 뜻을 가진 비속어다. ‘Merde’보다는 순한 맛이다. 프랑스로 해외 봉사를 갔을 때 두 욕을 다 알고는 있었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만큼 한국인의 이미지를 욕쟁이쯤으로 주입하고 싶지 않아 욕 나오는 상황을 마주할 때면 애써 순한 맛을 선택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왜 Merde 안 쓰고 Mince를 써? 너 뭐 어린 왕자야?”

날 어린 왕자에 빗대는 이유가 뭘까, 잠시 갸우뚱했다. 대화를 나누며 깨달은 바는 다 큰 성인 남성이 자꾸 ‘망쓰’, ‘망쓰’하는 게 가소롭게 보였다는 것. 우리말을 상황에 대입해보면 다 큰 성인 남성이, 그것도 당시 몇 날 며칠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까지 덥수룩하고 안 그래도 공룡상이라 인상이 센 편인 내가 자꾸 ‘어머나’, ‘어맛’, ‘아이코’ 따위의 감탄사를 내뱉은 꼴이었다.


욕을 느끼는 수위가 불어가 한국어보다 낮으니 ‘Merde’ 자체도 우리 욕의 뉘앙스보단 덜한 느낌이리라. 이미 순한 맛인 욕의 더 순화된 버전이 ‘Mince’이니 친구에게 순진함의 대명사인 어린 왕자 소리까지 들을 만도 했다.


외국어를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언어 속에 녹아있는 미세한 문화적, 정서적 차이를 점점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게 또 쏠쏠한 재미이기도 한데, 발견의 터가 비속어다 보니 제대로 욕을 써줘야겠다는 엉뚱한 다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무리 순한 맛이라지만, ‘Mince’를 사전에서 찾으면 분명 ‘비속어’ 태그가 달려 있다. 역시나 욕은 덮어 놓고 마구 해버리면 ‘똥, 망’이 되는 법이니 다들 조심하시길.


* 마지막 말장난에 관한 부연설명:

Merde의 뜻인 ‘똥’에 Mince의 발음 ‘망쓰’의 첫 글자를 붙여 욕 많이 하면 ‘똥망’된다는 의미를 담은 깨알 같은 언어유희... (한자를 소리로도 읽고 뜻으로도 읽는 일본어도 아닌데 뭐 하는 짓이냐고 화내지 마시길...)


DSC_0163.jpg MER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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