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욕고불만 09화

(6) TARÉ

욕마저 고상하다는 불어를 만나다(6)

by Fernweh

TARÉ [타레]


일도, 글도, 사랑도, 우리네 인생도 술술 풀리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누구나 한 번씩 배배 꼬여버리는 통에 답답해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딱 한 번 빙 휘둘러 매듭을 지어 둔,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을 싼 봉투도 꽉 묶여 버리면 푸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닌데, 실타래처럼 꼬인 인생의 기로를 풀어내는 게 쉬울 리 만무하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 일종의 답답증이 차올라 지끈거리곤 하는데, 차라리 몇 끼를 굶었을 때의 허기증의 헛헛함이 더 편안할 정도다.


실타래처럼 꼬인 상태를 풀어낼 방도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우리네 모습은 딱 바보 천치의 꼬락서니다. 실타래. 타래. TARÉ(타레). 6화까지 읽으셨다면 이제 불어 TARÉ의 뜻이 뭔지 바로 눈치채셨을 터. 그렇다, ‘바보’, ‘천치’를 의미하는 단어다. 빈도수만 따져보자면 우리말로 천치란 말을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듯 ‘꼬나’보고 ‘피똥’ 싸다 ‘똥망’되던 욕보다는 확실히 덜 쓰인다. 나 역시 친구들과 대화하며 듣거나 써본 적은 거의 없고 영화, 드라마에서나 겨우 한두 차례 본 게 다였던 단어다. ‘바보’보다 더 심한 욕이 버젓이 상용되는 만큼 수위도 그리 센 단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Taré’를 차용한 이유는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적어도 한 번은 겪어야 할 실타래를 풀어내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초급 문법’에 속한 내용을 하나둘 배워가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 언어 회로가 마비된다. 개별적인 항목처럼 배운 명사의 성(性)은 명사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형용사, 관사와 결합할 때 그 문장 성분들마저 변화시킨다. 남자 친구(un petit ami), 여자 친구(une petite amie)처럼 말이다. 쉬운 예인지라 아주 작은 변화(e가 붙는)만 적용하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국어가 아니어서 직관으로 빠르게 문법을 적용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앞에 쓰인 동사 역시 주어의 인칭에 따라 변화하니 온갖 문장 성분이 자기 멋대로 춤을 추는 판국이라 프랑스어 실타래는 꼬여만 가고, 저 자신도 바보(Taré)가 된 기분을 맛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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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는 실타래가 꼬여 ‘타레’가 되는 시점이 꽤 이르다. 일단 발음부터가 녹록지 않다. 같은 라틴어에 뿌리를 둬 동일한 문법 형태를 공유하는 스페인어와 발음만으로 비교하면 배우기 쉬운 쪽은 확실히 스페인어다. 물론 스페인어에도 (프랑스어의 R 발음인) 성대를 긁는 발음 ‘j’, ‘g’이나 혀를 덜덜 떨어서 내는 ‘r’ 같은 어려운 발음이 있으나 왜 이렇게 발음해야 하는지, 짜증만 나는 ‘œ’, ‘ø’ [외] 발음 같은 게 없어서 한결 수월하단 뜻이다. 아무튼,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프랑스인도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인간의 성대로는 발성조차 할 수 없는 외계인의 말을 하는 게 아니니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한 발 한 발, 발음과 문법을 차근차근 뗄 수 있다. 한국인에겐 힘든 발음과 어려운 문법의 혼종 괴물이 머릿속에 실타래 하나를 쓱 만들고 사라진 걸 깨달은 순간, 프랑스어 바보 천치가 되는 고비가 나타난다. 내 경우는 초급에서 중급으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없는 걸 새로 배우고 다듬어야 하니 고비를 맞이하는 시점이 이를 수밖에 없다. 있는 걸 다듬어 내기만 한다면 고비는커녕 실타래도 그다지 엉키지 않을 터. 우리말과 문법 구조, 어휘와 공통점이 많은 일본어를 배울 때 이걸 확실히 느꼈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익혀야 하는 고비가 있었지만, 고등학교 제2외국어로 수업을 들어 의도치 않게 저절로 글자를 다 뗐던 터라 겪을 법한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 불어는 유학을 위해, 일본어는 여행을 위해서였던, 애초에 배우려는 목적 자체가 달랐단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일정 수준 이상 배운 언어가 이 둘 뿐이라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술술 풀기도 전에 풀려 있던 것만 같던 일본어는 중급 이상에 이르렀을 때 오만 실타래가 다 꼬인 느낌을 받았다. 일단 가장 거대한 줄기의 실타래는 한자였고 곁가지로 날카롭게 뻗쳐 있는 실타래는 우리말보다도 복잡한 경어 체계였다. 우린 한자를 더는 혼용하지 않지만 한자어가 다수인 건 사실이고, 서양 언어에선 볼 수 없는 경어가 존재함에도 바다 너머의 한자와 경어는 다가가기 쉽지 않은 존재였다. 참 양념장(*일본어 ‘타레(たれ)’의 뜻)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실타래는 풀 수라도 있지 시꺼메진 양념을 다시 물처럼 투명하게 만들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 이상 배우길 포기했다는 후문)


신기하게도 초반에 그렇게 배배 꼬인 프랑스어 실타래는 중급 이상을 지나니 아주 빠른 속도로 스르륵 풀렸다. 꺼내고 보니 한껏 얽히고설켜 있어 ‘이걸 어떻게 풀지?’란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이어폰 줄을 한 땀 풀어냈을 때 두 땀 째는 더 손쉽게, 세 땀 째는 거의 저절로 풀리듯이 말이다. 기초로서 빼곡하게 다져 놓은 규칙성이 문법, 발음, 어휘, 각각의 갈래마다 바로바로 이어져 중급 단계의 어느 순간부터는 탄력을 받아 프랑스어를 쭉 공부할 수 있었다. 2화에서 참 많기도 많은 문법 규칙보다 더 많은 예외 때문에 불어를 자꾸 꼬나봤다고는 했지만, 이땐 예외도 그렇게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던 시기였다.


쉽게 진행되는 일이 끝까지 쉽게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거 같아 바보 천치라고 자책하다가도 갑자기 일이 술술 풀려 자존감을 회복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런 이치를 외국어를 배우다 깨우칠 줄이야. 아, 물론 실타래가 술술 풀린 시기가 그리 오래 지속된 건 아니다. 다음 화부터 다시 바보 천치가 되어 부들부들 욕하며 배워나갈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어 이야기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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