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마저 고상하다는 불어를 만나다(9)
[꺄쓰-투아/데가쥬-투아/바흐-투아/티흐-투아]
젠장, 제기랄, 염병할, 우라질 등 많기도 많은 욕이 불어 욕 ‘Merde’ 한 가지로 수렴될 수 있는 걸 볼 때마다 은근한 뿌듯함을 느낀다. 바른 말 고운 말이 아닌 건 아쉽지만, 보다 더 다양한 표현을 해낼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뿌듯함이랄까. (별걸 다 뿌듯해한다...)
희한하게도 꺼지라는 표현은 예외다. 우리말보다 프랑스어에 더 다양한 표현이 존재하는 듯하다. 단어 뜻을 어원부터 파악해가며 아주 정확히 해석해 우리말과 불어를 대조하면 꺼져, 나와, 비켜, 저리 가 등 어느 언어든 꺼지라는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걸 알 순 있다. 근데 ‘꺼져’ 이외의 표현은 욕이라고 하기엔 감칠맛이 덜하니 그것들을 다 빼버리면 우리말 속된 표현으론 ‘꺼져’만 남는다. ‘Merde’에 대응하는 우리말 비속어도 네 개, ‘꺼져’에 대응하는 불어 비속어도 네 개. 등가교환의 법칙을 이런 데서 만나다니, 언어의 세계는 참으로 심오하다. (이런 데 쓰이라고 만들어진 법칙이 아닐 텐데...)
물론 프랑스인은 저 많고 많은 표현을 앞서 기술한 꺼져, 나와, 비켜, 저리 가로 각각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내 귀에 들린 네 가지 표현은 다 ‘꺼져’로 들렸으니 참 4(싸)가지 없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달달하게 내 귀에 캔디를 때려 박아도 모자랄 판에 온갖 꺼지라는 말만 듣고 있는 것 같아 갑자기 서글퍼진다. 꺼지라는 어감이 싫어 표현에 쓰인 동사의 다른 뜻으로 기어이 해석을 달리 해 본다.
Casser: 부수다.(Casse-toi)
Dégager: 치우다.(Dégage-toi)
Barrer: 줄을 긋다.(Barre-toi)
Tirer: 잡아 뽑다.(Tire-toi)
그러니까... 상대방이 꼴 보기 싫다며 날 ‘부수고’, ‘치우고’, ‘그어버리고’, ‘잡아 뽑는’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니 이젠 서글픈 정도가 아니라 무서울 정도다. 7화에 표제 욕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표현의 형태가 비슷하단 걸 알아차렸을 터. 동사로 보이는 어떤 단어에 줄이 쓱 붙고 뒤에 티(t)와 오(o)와 아이(i)가 붙는 공통된 형태를 보고서 프랑스 욕은 ‘작대기+toi’를 붙이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 녀석들은 재귀대명사라는 게 쓰여서 이름도 그냥 동사가 아니고 어딘가 께름칙한 대명동사라는 게 된 애들인데, 명령문이라 저 재귀대명사란 게 뒤로 도치가 돼서....... (주저리주저리) 왜 프랑스어를 아주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지 공감하셨기를 바란다.
친구가 농담으로 꺼지라고 했던 적 말고, 진지한 톤으로 이 욕을 실제로 들은 적은 없다. 그런데도 여러 형태로 난무하는 꺼지란 말을 속속들이 기억하는 이유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이 꺼지란 말을 했던 장면을 다 기억해내면, 그 상황에서의 꺼지란 말이 상대방을 잡아 뽑으려던 건지, 깨부수려던 건인지 가늠하여 ‘꺼져’가 이토록 분화된 이유를 조금이라도 짐작할 텐데 이미 그 장면들은 머릿속에서 증발해버렸다. 그나마 정확히 기억하는 딱 한 가지 장면은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였다.
굉장히 원색적인 이야기가 흐르고 그 위로 두 주연 여배우의 더 짙게 농익은 연기가 펼쳐졌다. 둘 사이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뱉어낸 대사는 ‘dégage-toi’였다. 대사만 놓고 보자면 꺼지라는 말을 한 것이었지만, 그 대사가 하필 사랑하는 사람을 향했기에 꺼지라는 속된 뜻임에도 슬프도록 아름다운 한 줌의 이야기로 각인되었다. 지금 와서 새삼스레 그 장면을 떠올려도 ‘꺼져’의 여러 선택지 중 ‘dégage-toi’를 선택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연인 사이에서 상대를 치우는 정도가 부숴버리고 그어버리고 잡아 뽑아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역시 프랑스어는 꺼지란 말조차 사랑 안으로 포장하고 마는, 본 투 비 ‘고상한 언어’인 듯하다. 고작 ‘꺼져’란 대사 하나만을 가지고 영화 속 두 배우의 엄청났던 연기를 언급하는 게 너무 미안할 정도로 훌륭한 영화이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씩 보시길 바란다. (수위가 높다는 걸 미리 말씀드리면서...)
태생이 거칠고 저급한 게 욕이라지만, 가끔 욕은 그 거친 구석을 숨긴 채 쓰이곤 한다. 더는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인연을 단칼에 끊어내려던 한 프랑스 여인의 입에서 나온 꺼지란 소리가 고상하게 들렸다면, 오랜 세월 고된 하루하루의 장사를 온몸으로 버텨내고 오늘도 또 장사에 뛰어든 한국의 한 식당 주인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젠장 맞을’이란 소리는 정감 있게 들리듯이 말이다. 고상함(혹은 낭만), 정감(혹은 유쾌함). 두 나라의 국민이 다르게 품은 이러한 성향 때문에 프랑스에선 꺼지란 말이, 우리나라에선 젠장이란 말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뉜 거라고, 조금의 억지를 보태며 결론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