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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Dec 06. 2021

발라 버려

단상 (25)

 요즘 새 여행 에세이를 써 보려고 구상 중이다. 여행을 마음껏 다녀올 수 있는 때가 아니니 예전에 다녀온 여행을 울궈먹어야 하니 아이디어가 번뜩이지 않는다. 카드는 돌려라도 막을 수 있지, 글감 하나로 글을 돌려 막는 건 왜 이리 어려운 건지. 더 진전이 없는 글이 동동 떠 있는 문서 창만 둥둥 띄워둔 채 멍한 감각을 깨우려 샤워나 하러 들어갔다. 


 물을 끼얹고 머리를 감으려고 샴푸를 짰다. 몸은 샴푸를 짜고 있지만, 머리는 여전히 깜빡이는 커서처럼 깜빡이고 있는 채로. 대충 이런 식으로 풀어 나가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머리를 감으려고 손바닥 위에 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샴푸를 보았다. 그 텍스처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샴푸라기엔 과한 점성. 바디로션이었다. 머릿속의 흐름이 동작까지 이어지지 않아서 손에 닿는 걸 샴푸라 믿고 손바닥 위에 짜버린 것이었다. 


 하필 나란히 있던 바디로션과 샴푸 통은 색깔마저 갈색으로 똑같았다. 크기도 비슷하고 심지어 기역 자의 꼭지도 검은색으로 같았다.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땐 충분히 헷갈릴 법한 모양새였다. 문제는 둘을 구분하지 못한 것보다도 샴푸, 아니 바디로션을 너무 많이 짠 데 있었다. 적당량을 짰어야 하는데, 멍 때리느라 열 번은 족히 펌핑을 해버렸다. 버리긴 아까운데 그렇다고 물만 끼얹은 지금 이 상태에서 로션을 바를 수도 없는 노릇. 오늘은 그냥 물로만 샤워하고 나갈까. 그런다 해도 어쨌든 물기를 닦아야 하는데, 한 손바닥에 로션 또아리를 올려 둔 채 놀고 있는 다른 한 손으로 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는 상황도 웃기다. 화장실에서 달밤의 곡예를 할 것도 아니고... 선택지는 두 개로 좁혀졌다. 로션을 그냥 바르느냐, 버리느냐. 발라? 버려? 


제목은 괜히 타이거JK 노래를 BGM처럼 깔아보고자 물음표를 생략했다. 근데 절묘하게 물음표가 아닌 마지막 단어에만 느낌표가 들어가면서 몸에 물기가 남은 상황에서 '에라 모르겠다, 발라 버려!' 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내 선택은 '발라'가 아닌 '버려'였다. 환경에겐 미안하지만... 물 묻은 몸에 로션을 바르는 게 마치 카페 라테에 물을 붓는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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