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KAGOSHIMA
규슈 기차 여행은 반쪽짜리 여행이었다. 매번 내 손에 들려 있던 기차 패스는 JR 북큐슈 패스였다. 남북이 나뉜 나라 중 남쪽에 살고 북쪽은 갈 수 없는 처지여서 규슈에서라도 북쪽을 여행하자는 주의는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당시 남큐슈 패스는 없었다. 그래도 남큐슈를 기차로 가겠다는 여행자를 위해 ‘전’큐슈 패스가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미 다녀온 북쪽 지역을 빼고 남쪽만 여행할 건데 굳이 두 배나 비싼 패스를 사서 남큐슈로 가기엔 실질적인 가성비가 썩 좋지 않았다. ‘남큐슈 패스가 있으면 얼마나 좋아’, 이 생각을 품고 지내던 내게 일본에서 약 팔천 킬로미터 떨어진 트빌리시에서 충격적이지만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남큐슈 패스로 갔다 왔지요
게스트하우스 로비에 둘러 앉아 나누던 여행 이야기가 남큐슈의 가고시마까지 당도했다. 후쿠오카에 갈 때마다 속으로만 그리던 그곳을 다녀왔다는 게 내심 부러워 어떻게 가고시마에 갈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가 남큐슈 패스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없는 줄로만 알았던 남큐슈 패스는 내가 프랑스에 사는 동안 새초롬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더니 웬걸, 여행이 타이밍이다. 그때 벌써 남큐슈 여행을 언제 갈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점심 먹으면서 저녁 뭐 먹을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생긴 건 패스만이 아니었다. 남큐슈의 두 도시, 가고시마와 미야자키를 잇는 직항편도 생겼다. 이건 뭐 대놓고 여행가라는 계시다. 가고시마로 들어가서 기차로 유유히 서쪽부터 동쪽을 가로지르다가 미야자키에서 나오는 루트도 구태여 짜려 하지 않아도 이미 짜여 있었으니까. 꿈에서만 그릴 줄 알았던 남큐슈 패스를 쥐고 가고시마에 입성했다.
여기서 잠깐, 김빠지는 소리 먼저. 기차 패스로 설레발쳤으니 기차 여행 썰을 바랐겠지만, 이 글의 전반적인 콘셉트가 ‘도시 여행’임을 잊지 마시길. 다른 도시는 쏙 빼고 여행의 관문이었던 가고시마만 다룰 작정이다. 사실 남큐슈 패스로 찾은 명소 대부분이 도시보다는 자연에 가까웠다. 가고시마에 버금가는 도시 미야자키마저 거리를 장식한 야자수 때문인지 휴양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일본에선 오키나와에서나 볼 줄 알았던 그 야자를 미야자키에서 볼 줄이야. 아무튼, 규슈의 남쪽에서 진정한 도시의 풍미를 맛본 곳은 가고시마뿐이었으니 도시병이 발동한 시내의 산책자는 가고시마의 기록을 도시 여행기 한 페이지에 남기는 중이다.
기차 패스는 3일권이었는데 3일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개시 후 연속 3일간만 쓰게끔 되어있는 패스였다. 본격적인 기차 여행 시작 전 이틀 동안 가고시마를 둘러보기로 했다. 여행 첫날, 배로 20분이 걸리는 화산섬 ‘사쿠라지마(桜島)’에 가려고 이른 아침부터 부랴부랴 호텔 방을 나섰다. 화산섬의 ‘섬’에서 시선을 한 칸만 앞당기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산은 보라고 있는 거라고 떵떵거리던 놈이 제 발로 산을 찾다니. 마지막 차례까지 오는 동안 도시에 보인 집착을 반성하기라도 하는 건가. 반성은 무슨, 아주 귀여운 계기로 화산섬을 찾았다.
전날,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에 도착했을 땐 이미 까만 밤, 아니 환한 밤이었다. 호텔은 직선적인 감각만으로 빚은 듯한 일본 특유의 상점가 한복판에 있었고, 저녁 하늘의 암흑은 상점가의 아케이드에 막혔다. 외딴 숲속, 깊은 산골짜기도 아닌 번화가에 체크인하는 모습에 심취한 도시의 여행자는 기어이 단출한 짐만 챙겨 시내 저녁 산책에 나섰다. 어차피 열차 예약하러 기차역에 가야 했기도 했고. (JR패스 소지자도 고속/특급 열차는 사전 예약이 필수다) 가고시마가 끓어오르는 흥을 유흥으로 떨쳐낼 홍대나 야경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다페스트 같은 도시가 아니니 시내 저녁 나들이는 특별할 게 없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트램이 그나마 레트로 분위기를 자아낸 것 말고는. 기차를 예약하다 본 팜플렛에는 시내 교통 패스인 ‘가고시마 큐트 패스’가 있었다. ‘큐트’(cute), 화산섬을 찾은 귀여운 계기는 정말 이름 자체가 귀여웠다. 방금 본 트램이나 시내버스는 물론, 사쿠라지마를 잇는 페리와 그 안의 산길을 종횡무진 달리는 버스까지 다 탈 수 있는 패스였다. 화산섬의 ‘섬’까지는 제 발로 찾지만, 결코 ‘산’은 제 발로 오르지 않을 게으른 뚜벅이 여행자인 내게 딱 맞는 패스였다. 큐트가 아니라 러블리(lovely)라고 부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배에 실었던 몸을 사쿠라지마 순환 버스에 싣고 나서야 깨달았다. 러블리는커녕 큐트라고 부르기에도 어쭙잖은 여정이라는 걸. 전망대 겸용 정거장에서 버스는 길어야 15분, 짧으면 단 5분만 정차했다. 배차가 한 시간에 한 대꼴이라서 타고 온 차를 보내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섬*에서 불안에 떨며(이건 농담이다), 정류장 주변에 전망대뿐인 휑한 곳에서 멍하니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이게 진짜다) 거의 모든 탑승자가 관광객이라서 기사가 승객이 다시 다 탔는지 확인한 후에 출발했지만, 그래도 혹시 나만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가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하는 통에 전망 감상을 조급하게 해야 했다. 급급한 마음은 마지막 스폿이자 제일 높은 고도에 자리한 유노히라(湯之平) 전망대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져 풍경을 눈으로 보는지 코로 먹는지 모를 정도였다.
*사쿠라지마는 활화산이다. 21년 4월 말 실제 분화했다는 보도를 접하기도 했다. 다행히 내가 여행할 당시는 화산 활동이 멎은 때라 입도가 가능했다.
산속을 누비며 코로 먹던 풍경은 시내에 돌아온 뒤에야 눈으로 맛볼 수 있었다. 쾌속선이 아니라 20분이나 걸릴 뿐, 거리상으론 사쿠라지마는 가고시마의 지척에 있다. 사쿠라지마의 고도는 천 미터가 넘어서 수직적인 웅장함이 가까운 거리에 더해져서 가고시마 시내 어디에서든 보였다. 파리 시내 어디든 에펠탑이 보이는 것처럼. 이름값을 못 하던 큐트 패스가 귀여움을 재장착한 건 아까의 산을 정면에 두고 편안히 감상할 수 있는 ‘시로야마(城山)’ 전망대로 갈 때였다.
정확히는 전망대로 가는 버스를 탈 때. 일본어 ‘야마’의 뜻은 한자로 알 수 있듯 내 앙숙인 산이다. 사쿠라지마에 비하면 동네 뒷동산 수준이지만, 어쨌든 산은 산이다. 전망대까지 가는 버스가 없었다면 두 다리로 걸어 올라야 했다. 여행을 빌미로 올라가 보자며 큰맘 먹기엔 속된 말로 ‘야마’ 돌 상황이었다. 다행히 전망대 코앞까지 들어가는 버스가 있고, 큐트 패스로 언제든 타고 내릴 수 있는 시내버스라서 패스가 더할 나위 없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전망대 앞 바다 너머의 널찍한 프레임을 사쿠라지마가 하나의 큰 사다리꼴을 그리며 채웠다. 아까 배를 탔던 선착장이 바다와 땅의 경계를 그었고, 시선을 땅의 영역 쪽으로 당기자 방금 그 자연의 풍경이 금세 도시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들쑥날쑥 제각각 솟은 건물은 하나의 도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불연속적인 선과 면을 빼곡하게 만들었다. 건물 층층이 놓인 창문이 촘촘하게 들어찬 불규칙한 답답함에 규칙으로 끼어들며 그나마 숨통을 열어 준다. 멀찍이 떨어져서 자연과 도시를 한 프레임에 두고 바라보니 나조차도 도심의 답답함보다 탁 트인 자연에 끌렸다. 순간 이런 기분이라면 자연으로 훌쩍 들어가는 여행을 할 만하겠다고 장담할 정도로. 오전에 화산섬에 기어이 들어가 급하게 구경할 때의 밭은 숨이 떠올라 이내 생각을 바로잡았다.
‘산에 들어가면 숨만 차잖아. 이렇게 멀리 물러나서 보니 얼마나 편해. 역시 산은 보라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