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비 클라시쿠리 까바 vs. 아이스 아메리카노

조지아어 ცივი კლასიკური ყავა n. 아이스 아메리카노

by Fernweh

말을 모으는 여행기, 말.모.여. 13)


조지아어 ცივი კლასიკური ყავა [찌(v)비 클라시쿠리 (kh)까(v)바] n. 물.



어느 식품회사에서 신제품 간장을 발표했다고 치자.

요즘 유행하는 B급 감성을 담아 간장 이름은 이랬다.


<간장 공장 공장장 간장>


이 간장을 사러 마트에 간다. 지나가던 직원에게 어디 있냐고 묻는다.

“죄송한데 간장 공장 곤잔... 아니 강장 곤장 공장...

(한숨) 간. 장. 공. 장. 공. 장. 장. 간장 어디 있어요?”

따위의 ‘웃픈’ 장면이 연출될 지도 모른다.


이제 한글을 막 뗀 외국인이 말로 저 간장을 주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조지아어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하기가 딱 저런 상황이었다.


조지아 여행은 쿠타이시(Kutaisi, 수도 트빌리시 서쪽에 위치한 조지아 제2의 도시)에서 시작했다. 유럽에서 쿠타이시로 넘어오기 전 조금이나마 조지아어 글자를 배워 두었다. 로마자 알파벳이 아니어서 굉장히 어려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글자 자체는 복잡하지 않았다. 문제는 발음. 한 가지 글자에 한 가지 소리. 이 원칙에 맞게 발음상 예외를 두지 않고 자음을 세분화하다 보니 온갖 어려운 발음이 다 들어가 있었다. 프랑스어의 ‘R’ 발음, 러시아어의 ‘쯔(Ц), 츠(Ч), 쥬(Ж), 슈(Ш)’ 발음부터 앞서 살펴본 ‘ყ’(ㅋ+ㄲ+ㅎ) 같은 최종 빌런 발음까지. 인터넷 검색 자료만으로는 발음까지 정확히 배우기 힘들었다.


그런 내게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1일 조지아어 강사가 되어 주었다. 물론 속성 강의만으로 발음을 정확히 익힐 순 없었다. 내 딴에 맞게 발음한다 해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다시 따라 해 보라며 몇 번씩 더 발음해 보인 게 전부였다. (그가 들려준 발음도 내 귀에는 내가 낸 발음과 똑같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중간중간 ‘yes!’, 발음이 정확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다섯 번에 한 번은 성공하는 발음이니 ‘물’, ‘커피’ 같은 짧은 단어는 도전해봄 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5편에 썼듯이, 물(წყალი)은 실패했지만.

IMG_4992.jpg 얼떨결에 숙소 주인에게 조지아어 속성 특강을 들었다.


버젓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판다고 광고를 붙여 둔 던킨도너츠 매장에 들어갔다. 타지에 여행 왔으니 로컬 카페를 가고 싶었지만, 조지아도 유럽처럼 로컬 카페에선 ‘아아’를 잘 팔지 않을 듯해서 던킨도너츠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커피(ყავა, 까바) 단어는 알고 있으니 간판을 쓱 보고, 아이스를 붙여 주문하면 되겠다는 알량한 생각을 하며.


메뉴판에는 ‘차가운 커피’ 정도로 간단히 적혀있지 않았다. 적혀있는 거라곤 ‘간장 공장 공장장 간장’ 같은 긴 메뉴뿐. (그게 바로 제목의 ცივი კლასიკური ყავა이다) 조지아 글자를 이제 막 뗀 사람이 읽기엔 쉽지 않았다. 심지어 화면이 5초 정도 후에 영어 메뉴 화면으로 전환됐다. 화면 전환 없이 영어, 조지아어 메뉴를 병기했다면 iced americano에 해당하는 메뉴를 보고 떠듬떠듬 읽어볼 수라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조지아어로 커피 주문하기도 실패.


여행지에서 외국어로 말해보는 소소한 재미를 연달아 빼앗겨 침울한데 던킨도너츠는 원하던 아이스커피가 아닌 웬 커피 슬러시를 줘 날 더 침울하게 만들었다. 영수증에 찍힌 메뉴 이름을 한 글자씩 살펴보았다. ა 아, მე 메, რი 리, კა 카, ნო 노. 분명 아메리카노가 맞다. (조지아에선 아이스 아메리카노=커피 슬러시인 것) 와이파이를 연결해 던킨도너츠 조지아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다음번에라도 제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위해 메뉴판의 <ცივი კლასიკური ყავა>의 정체를 알아야 했다. 영어 페이지와 대조해보니 ‘cold classic coffee’였다. 가운데 형용사도 클래식에서 따 온 게 분명한 ‘클라시쿠리’였다.


IMG_5016.jpg 조지아식 아메리카노는 커피 슬러시... 원으로 표시한 영수증을 보면 조지아 글자로 '아,메,리,카,노'라고 써 있다.


간장 공장 공장장을 연습하듯 ‘찌비 클라시쿠리 까바.’를 꾹꾹 머릿속에 눌러 입력했다. 다음날, 같은 매장에 가 저 문장으로 주문을 한 결과는 아래 사진과 같았다.


IMG_5040.jpg 드디어 원하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에 성공. 그것도 조지아어로. 당이 떨어졌으니 도넛도 하나 먹었다.


그러고 보니 말.모.여. 2편 주제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던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얼죽아’인가보다.



zjnl.gif '아아' 한 잔을 위해 곱씹어 외운 단어, 손으로도 한 번 써보기. (클릭하면 끝까지 재생)



조지아, 므츠헤타(Mtskheta)
조지아, 시그나기(Sighnaghi)

조지아, 쿠타이시(Kutaisi)에서 트빌리시(Tbilisi)가는 열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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