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수 없는 저주의 숫자

체코어 숫자 333과 444

by Fernweh

말을 모으는 여행기, 말.모.여. 14)


체코어 숫자 333과 444.


프라하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메뉴 이름이 '333'이면,

안 먹고 만다.

프라하에서 꼭 사오라는 기념품 이름이 '444'라면,

미안하지만 못 사간다.


베트남에서 불길한 숫자로 여기는 ‘3’ 때문이 아니다. (3명이 불 하나로 담뱃불을 붙이면 불행해진다는 미신이 있음) 죽을 사(死)자와 소리가 같아 우리나라에서도 불길하게 여기는 ‘4’ 때문도 아니다. 이런 미신이 없는 체코에선 ‘3’, ‘4’를 333, 444처럼 연거푸 써도 아무 상관 없다. 다만 체코인 말고 외국인의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게끔 ‘에르쥐(Ř)’의 저주가 걸린 숫자가 333과 444이다.


<말.모.여. 12 편> 에는 조지아어 ‘ყ’ 발음이 “체코어 ř 이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충격.”이라고 적었다. 체코어 알파벳 ‘ř’가 바로 저주의 이름과 같은 에르쥐이다. 해외 봉사에서 같은 팀으로 만난 체코 친구에게 배운, 난생처음 듣는 발음의 글자였다. 버젓이 r이 있으니 ㄹ 발음이 나지만 소리만 들어보면 ‘ㄹ+ㅌ+ㅈ’ 소리이다. 리을과 티읕과 지읒을 한 번에 내라니, 무슨 소리일까 싶은데 그 소리가 ř 소리이다.


친구의 친절한 설명대로 따라해 보자. 에르쥐를 에르(r)/쥐로 끊어라. (에르‘쥬’에 가깝지만, 사전상의 표기인 ‘에르쥐’를 따랐다) 대신 에르(r)는 스페인어 발음으로, 즉 진동하는 r 발음이다. (제시의 노래 눈누난나 속 ‘그ㄹㄹㄹㅐ서’를 떠올리면 쉽다) 진동하는 r 발음을 친구에게 해 보이니 아주 좋다며 계속 설명한다. ‘쥬’ 소리를 같이 내야 해. 에르와 쥬를 같이 발음해서 에르/쥐야. 쉬운 설명이지만 쉽지 않은 발음. 친구는 실제 체코 어린이들도 어려워한단다.


ㄹㄹㄹ~ 혀를 떨며 ‘쥬’ 소리를 내 보면, 혀와 입천장이 부딪혀 파열음이 끼어들어 ‘ㄹ+ㅌ+ㅈ’ 소리로 들린다. 해외 봉사의 인연으로 체코 여행 갔을 때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프라하에서 마침 맥주 축제, 커피 축제가 한창이어서 친구를 현지 가이드 삼아 열심히 돌아다녔다.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다 보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듯 ‘ř’발음이 들어간 메뉴를 읽어 보았다. 친구의 발음 교정을 거듭한 끝에 ř 발음을 성공했다. 바로 응용에 들어간다. 친구가 알려준 체코 숫자 3과 4. t - ř - i, čty - ř - i. 룰라가 부른 ‘쓰리! 포!’가 체코어였다면 이 노래는 발매되지 못했으리라. 정색하는 날 보고 재미가 들렸는지 에르쥐 저주가 세 번 겹친 333, 444를 알려준다.


333: tři sta třicet tři

444: čtyři sta čtyřicet čtyři


외국어 표기법상에는 ‘르ㅈ’로 적으라지만 너무 길어지니 파열음 'ㅌ'으로 발음을 적어보면,

333: 트티 스따 트티셋 트티

444: 취띠티 스따 취뜨브르띠니 취트티- 가 된다.


이대로 읽어봐도 어려운데 실제론 훨씬 어렵다. (꼭 한 번 실제 발음을 들어보시길) 문득 서양 사람에게도 한국어 발음이 쉽지 않다는 게 생각났다. 너도 한번 당해보라며 한국어 숫자를 알려주고 세보라 했다.


“일르... 이... 솸... 사, 오우~ 유크! 췰, 빨, 쿠 쉽!”


복수 실패. 복잡한 체코 자음 발음으로 혀 근육이 단련된 건지 곧잘 발음한다. 삼백삼십삼도 사백사십사도 시켜봤다면 쉽게 발음했을 것이다. 333코루나, 444코루나(체코 화폐 단위)짜리는 죽어도 안 산다고 했더니 친구 표정이 더 의기양양해졌다.


1374763_633946106644153_740509307_n.jpg 한국어 숫자를 금방 익혀 버린 친구. (초상권 보호를 위해 블러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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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커피 축제와 맥주 축제가 한창이던 체코, 프라하 여행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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