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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an 13. 2022

술 권하는 검진

단상(28)


미루고 미루다 지난 연말이 되어서야 건강 검진을 받았다. 건강에 과신하며 사는 편은 아니지만 어떤 질환의 증후를 느끼며 살지 않았으니 검진 결과표도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 볼 요량이었다. 마침 해가 바뀌고 받아 볼 테니 산뜻하게 한 해를 시작하라는 기분으로. 예상했던 대로 별다른 이상 증후는 보이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이 키에 이 몸무게가 적정 체중이 말이 돼?'라며 기준 자체에 의문을 품으며 합리화를 하고 마는 비만도 수치를 볼 때 잠깐 놀라긴 했지만, 체중이야 검진 당일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던 터라 놀라운 축에도 끼지 못했다. 


비만도가 표기된 페이지에서 잠깐 멈칫했던 걸 빼고는 내 시선을 오래도록 잡아 끈 페이지는 없었다. 마치 회원 가입 약관 동의서 따위를 대충 훑듯이 검진 결과서를 후루룩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끝 페이지에 가까워질 즈음 나타난 생활 습관에 관한 코멘트에 시선이 멈췄다.

적정 음주를 권유한다고 하니 누가 보면 술 깨나 마시는 사람으로 여기겠지만, 난 '알쓰'다. 적정 음주량을 논하기 전에 주종 불문 한 잔이 치사량인 허약하디 허약한 간의 소유자에게 적정 음주가 웬 말인가. 검진 전 작성한 문진표에도 분명 '하루 한 잔 미만'으로 체크했다. 일 년 내내 아예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건 아니니까. 내가 문진표를 잘못 이해하고 체크한 건지 검진 결과를 다시 살펴봤더니 음주량에 '하루 한 잔 미만, 일주일 9잔 미만'이라는 엉뚱한 통계가 달려 있었다. 나처럼 주량이 한 잔 이하면서 마셔 봐야 간헐적으로 일주일에 어쩌다 한 번 마시는 사람은 술은 마시는 경우가 있더라도 아예 안 마신다고 응답하는 편이 더 논리적이었으려나...


적정 체중 자체를 너무 가볍게 마련해 두어서 누가 봐도 뚱뚱하지 않은 이에게 '경도 비만', '과체중' 따위의 태그를 붙이는 건 그를 놀리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방 차원에 있다. 자칫 방심하면 살이 불어나는 거야 시간문제고, 비만이 다른 성인병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시간문제니까. 그러니 내게 적정 음주를 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과음은 좋을 게 하나 없다는 뻔한 말을 붙인 것이리라. 안 그래도 '알쓰'이니 어쩌다 한 번 소량의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적정선을 지키라는 그런 뜻으로. (근데 애초에 주량이 한 잔인 사람이 적정선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문득 '프렌치 패러독스'가 떠올랐다. 매일의 음주가 건강을 해친다는 상식과 달리 한두 잔의 와인을 늘 반주로 곁들이는 프랑스인의 심혈관 건강이 더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자아낸 '프랑스인의 역설' 말이다. 건강 검진 속 저 말은 으레 그리해야 한다는 뻔한 지침이 아닌 것일까? 호랑이의 해를 맞이하여 호랑이처럼 기운차게 술을 마셔 보라는 역설의 사주일지도 모르겠다. 지침을 따를지 사주를 받을지는 내 간의 알코올 해독 여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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