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68)
안착. 편안할 안(安) 자가 쓰인 이 단어처럼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자리도 잡았으니 이제 생명수를 마실 때가 되었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을 정도로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인 누군가가 무더위 속 오아시스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쭉 빨아먹듯, 나도 그에 버금가는 생명수를 들이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얼죽아인 그가 말하는 생명수와도 같다는 아아는 어디까지나 비유에 해당하겠지만 - '~같다'라고 표현할 수 있으니까 - 난 생명수를 마시지 않으면 문자 그대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니 생명수가 흐르는 알맞은 장소에 안착한 지금, 일말의 망설임도 두어서는 안 된다.
적당히 생명수를 퍼올릴 수 있는 위치에 조심스럽게 입을 댄다. 묘한 쇠 냄새가 비릿하게 느껴진다. 철분이 많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입으로 쭉쭉 빨아들인 생명수를 꿀떡꿀떡 목 뒤로 넘긴다. 이윽고 내 바이탈 사인에는 초록불이 들어온다. 생명이 위태로워지기 일보 직전, 그러니까 빨간 불이 들어오기 일보 직전에 만난 새빨간 생명수는 그린 라이트를 밝혔다. 빨강에 빨강이 더해지면 초록이 되는 건가?
엉뚱한 생각을 떨쳐내라는 듯 갑자기 몸이 위로 솟구친다. 아직 생명수를 다 마시지 않았는데, 편안하게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 곳이 마냥 편안한 곳은 아니었나 보다. 몸이 붕 떠오른 지 일 초도 되지 않아 이번엔 아래로 훅 떨어진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도무지 알아챌 수가 없다. 그러더니 또 일 초도 안 돼서 아까처럼 붕 위로 솟는다. 일 초 뒤 또다시 아래로 훅, 내가 붙들고 있는 정체 모를 자리가 꺼진다. 생명에 초록불이 들어오긴 했어도 아직 완전히 켜졌다고 하긴 힘들다. 점멸하는 그린 라이트. 생명수를 더 마시기를 포기한다면 깜빡거리는 초록불처럼 내 생명도 깜빡깜빡, 위태로워질 것만 같아 코어에 단단히 힘을 준다. 허리케인을 만난 건지 어쩐지 모르겠으나 자꾸만 솟구쳤다가 떨어졌다가 요동치는 생명수의 원천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딱 두 모금 정도만 더 마시면 좋으련만 멀미가 생긴 탓인지 슬슬 힘이 풀린다. 어쩌면 내가 자리 잡은 곳이 무슨무슨 월드라고 불리는 놀이공원에서 유명한 자이로드롭인지도 모르겠다. 아, 아니지. 그 기구는 딱 한 번만 아래로 슈웅, 빠르게 떨어지고 끝나잖아. 오르락내리락거리길 반복하는 기구 이름은 뭐더라. 아무렴 어떠랴. 일단 이 망할 멀미와 현기증부터 떨쳐낼 수 있는 고요한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위로 훅 솟구치는 타이밍에 생명수를 마시기 위해 바짝 붙여 둔 입과 몸을 지탱하기 위해 힘을 꽉 주고 있던 사지의 긴장을 푼다. 솟구치는 그 반동에 가녀린 내 몸도 붕 하고 떴다. 그리고 짝.
붕 다음에 이어진 의성어가 왜 짝인가. 붕-짝.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의성어 아닌가. 궁리하기도 전에 의식이 흐릿해진다. 정말 허리케인을 만났던 걸까.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떴을 때 돌풍에 휘말린 둔기 같은 무언가가 나를 덮쳤나 보다. 휘둘린 둔기에 생명의 초록불이 산산조각 났다. 깨진 초록색 조명의 파편 사이로 새빨간 생명수가 배어 나온다. 이러려고 새빨간 생명수를 게걸스럽게 마신 게 아니었는데. 빨강과 빨강의 합은 초록인 줄로만 알았는데 빨강과 빨강은 결국 빨간 결말이다.
인간의 변(辯)
더위가 기승하던 여름 때보다 날이 선선해진 요즘 모기가 더 기승을 부리는 듯하다. 실내 자전거의 페달을 분주히 돌리며 저녁까지 꾸역꾸역 채워 넣은 칼로리를 불태우는데, 불현듯 오른쪽 종아리에 뭔가가 스치는 걸 느꼈다. 별 거 아니겠거니, 무심하게 페달을 계속 돌리는데 왠지 모르게 종아리가 가렵다. 페달 돌리길 멈추지 않고 종아리에 손을 뻗는다.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종아리의 가려운 부위에 손을 살짝 대보니 조금 부풀어 오른 게 손끝에 감지됐다. '모기에 물렸구나', 자각과 동시에 때아닌 분노가 치민다.
페달을 돌릴수록 하체에 피가 돌아서 그런지 부어오름과 간지러움이 가만히 있을 때보다 더 빠르게 활성화되는 것만 같았다. 한 번씩 종아리에 손을 뻗어 모기 불린 부위를 문지른다. 페달에 맡겨진 채 올라왔다가 떨어지는 통에 문지르고 긁으려 해도 찰나일 뿐이다. 오른쪽 옆구리를 접어 몸을 오른쪽으로 엉거주춤하게 숙인 채 요동치는 종아리를 붙잡고 물린 부위를 벅벅 긁는다. 그 순간 세시 방향으로 뭔가가 비정형의 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게 보인다. 종아리를 긁던 오른손을 부리나케 위로 뻗는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왼손도 동시에 휘둘러 손뼉을 맞댄다. '짝' 하는 소리가 퍽 경쾌하다. 펼친 손에는 납작하게 눌린 모기 시체와 방금 내 몸에서 뽑아낸 새빨간 피가 데칼코마니처럼 펴져 있다. 쉼 없이 페달을 돌리는 종아리에 용케 앉아 피까지 잘도 빨아 먹은 녀석이지만 휘두르는 손을 피할 순발력은 없었나보다.
* 구분선 위의 글은 모기의 시점으로 써 본 글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