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rnweh Oct 06. 2022

나, 천수관음 좋아하네?

단상(69)


천 개의 손을 가진 관음상. 가만히 있는 동상의 모습 자체도 웅장한데, 이게 움직인다면? 그 웅장함은 말 다 했지 뭐... 천 개의 손이 샤라락, 촤라락, 슈루루룩 움직인다는 뜻이니까. 어떤 의성어로도 그 웅장함을 제대로 빗대어 표현할 수 없을 움직임을 <스트리트 맨 파이터>에 출전한 '저스트 절크(just jerk)'가 해냈고, 영상을 본 뒤 왠지 모르게 '나 천수관음을 좋아했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작년 스우파 열풍에 몸을 들썩인 1인이지만, 희한하게 그 불씨가 스맨파까지 옮겨 붙진 않았다. 원래 스트릿 댄스를 좋아한 것도 아니라서 사실 스우파도 재방 보다가 뒤늦게 관심에 불이 붙은 케이스였다. 끝물에 가서 본방사수 하고 투표하고 했지만, 그 여파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오죽했으면 독립출판으로 낸 프랑스어 욕 에세이 <욕고불만>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모니카와 가비의 멘트를 각각 인용했을까.


그만큼 이전 시리즈를 좋아했으니 스맨파를 한다는 소식이 반갑기는 했다. 그렇지만 애초에 TV를 잘 챙겨보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챙겨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가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몇몇 화의 재방을 보게 됐다. 근데 춤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기보다 팀 간의 갈등과 댄서 간의 서사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기껏해야 춤은 2~3분 보여주고 말아서 김이 새 버렸고 급기야 채널을 돌렸다. 어쨌든 2시간에 가까운 분량을 채워야 하는 건 사실이고, 스우파 때도 갈등 구조가 드러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더 격하고 모욕적인 갈등만을 그려내는 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참가자들 입에서 욕설이 나올 때마다 '삐-', '삐-'거리는 소리도 거슬릴 정도였다.


그러다 그저께였나, 또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엠넷까지 와버렸는데, 이번에는 곧 춤 영상이 나올듯해 잠자코 채널을 그대로 놔두었다. 그리고 접한 영상이 바로 '저스트 절크'의 메가 미션* 영상이었다.

*대규모 인원을 섭외하여 한 편의 춤을 완성시키는 미션


이 팀의 이름이야 세계에서도 워낙 유명하고 평창 올림픽 개회식 공연도 했던 터라 익히 알고 있었다. 스우파에 출연한 '리정' 역시 저스트 절크 출신임을 언급했던 기억도 났고. 평창 개회식에서 이들이 도깨비 탈이었나 무슨 탈을 쓰고 춤췄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려던 찰나였다. 미션 영상의 재생과 동시에 굳이 그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이 팀의 저력을 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저력이었다. 다른 팀 영상도 뒤늦게 찾아봤는데, 이 미션만 놓고 본다면 거의 뭐 어우저, '어차피 우승은 저스트 절크'였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확 사로잡은 건 바로 '천수관음'을 표현한 부분. 처음에 샤라락, 촤라락, 슈루루룩,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은 의성어까지 끼워 맞추며 표현해보려 했던 춤사위였다. 나중에 유튜브에 들어가서 저스트 절크의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봤는지... 나만 이 화려한 춤사위에 빠진 게 아니라는 걸 육백 만에 가까운 조회수가 증명해 준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 기준, 조회수는 575 만회다)


샤라락
촤라락
슈루루룩


덕질은 아주 사소하고도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잠깐 본 뒤 더는 안 볼 것 같던 프로그램을 우연히 다시 보게 됐고, 거기서 샤라락, 촤라락, 슈루루룩, 천수관음을 만나버렸고, '나 천수관음 좋아했네?'라며 어제 새벽 2시까지 저스트 절크의 이 영상 저 영상을 찾아봤고, 다른 영상 속 천수관음 파트 같이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샤라락, 촤라락, 슈루루룩이 지나가는 파트를 보며 입이 떡 벌어졌고, 어떻게 초 단위의 칼군무를 완벽하게 맞출 수 있는지 궁리했고, 일분일초를 저렇게 딱딱 들어맞게 살아내야겠구나 다짐해보다가 게으른 천성이 떠오르며 잠이 쏟아졌고...(이게 뭔 뜬금없는 의식의 흐름인지...)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오늘도 열심히 무한 반복 시청한 천수관음 미션 영상. 잠들기 직전 게으른 천성이 어쩌고 저쩌고, 일분일초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다짐은 제쳐두고 무료했던 일상에 아주 잠시나마 활기를 불어넣어준 영상을 만난 기록을 잠깐 끄적여 보았다. 천수관음의 기운을 계속 받다 보면 무료함도 샤라락, 촤라락, 슈루루룩 밀어낼 수 있지 않을까나...

매거진의 이전글 생명수를 마신 자의 최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