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74)
가끔 질리도록 먹은 음식을 앞에 두고 있을 때면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듯할 때가 있다. 요즘 외출 전 향수를 뿌릴 때면 딱 저런 기분이다. 음식 이야기로 글의 포문을 열었으면서 향수 이야기로 넘어가는 건 꽤 과감한 비약 아닌가. 뭐, 둘 다 어떠한 냄새가 난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비약은 못 본 척하기로... 둘의 공통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질린다'는 게 이 글의 포인트니까.
늘 향수를 사면 적은 용량의 향수를 샀다. 가성비 면에선 당연히 대용량을 사는 게 낫지만 휴대성을 고려하여 가방에 쏙 넣고 다닐 만한 용량을 골랐다. 대용량도 마음만 먹으면 들고 다닐 수야 있겠다마는 굳이 가방을 무겁게 하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공병에 덜어 가지고 다니면 휴대성과 가성비 둘 다 챙길 수 있는 일석이조라지만, 일단 어디론가 공병을 사러 가는 그 시작 자체가 귀찮았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향수를 들고 다닐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올여름엔 평소에 쓰는 것보다 더 큰 용량의 향수를 샀다. 이 향수 브랜드가, 이 향수의 향이 사족을 못 쓸 만큼 좋아서였던 건 아니다. 할인에 코가 꿰여 버렸을 뿐. 일단 코스메틱 숍 자체에서 대대적인 세일을 하는 중이었고, 이 제품은 '묻고 더블로 가' 식으로 세일 기간 막판에 한 번 더 할인이 됐다. 여기에 회원에겐 또 한 번 낮춘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를 유혹했다. 가성비든 휴대성을 셈하는 것조차도 소용량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가격이 된 대용량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는 겨울을 앞둔 지금, 써도 써도 줄지 않는 '여름' 향수에 질려 버린 나를 마주하고 있다. 나가기 전 칙칙- 향수를 뿌릴 때면 청량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여름 바다를 떠올리게 만드는 새파란 용기처럼 새파란 향이다. 근데 지금 같은 계절엔 그만 청량하고 싶을 따름이다. 가을에 걸맞은, 어렴풋하게 나무의 질감이 느껴지는 듯한 향수를 뿌리고 싶다. 가을이 너무 짧아졌으니 가을은 건너뛰자. 그럼 겨울과 잘 어울리는 머스크 계열의 향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듯한 향수를 뿌리고 싶다. '파랑파랑'한 향은 좀처럼 나무의 질감에게, 머스크 계열의 향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향수를 들이붓듯 수십 차례 뿌리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여름부터 줄기차게 뿌려 댔다고 4/5 정도는 줄어 들 건 보며 한겨울이 되기 전에는 다 쓸 수 있을 거라며 소소한 위안을 삼는 중이다. 혹시 가을이고 겨울이고 여름 향수를 뿌리시는 분이 저희 집으로 와주신다면 원하시는 만큼 여름 향수를 뿌려 드립니다, 호호. (이럴 거면 당근 마켓에 올리는 게 낫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