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77)
주의력 저하라고 해야 하나... 생각이 한 군데로 모이지 못하고 자꾸 사방팔방으로 튀는 원인을. '요즘 들어'라고 시기를 특정하지 않은 건 나라는 인간의 디폴트 값에는 애초에 멀티 태스킹 능력이 없어서다. 아, 그럼 갑작스럽게 주의력이나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란 뜻이니 다행인 건가.
며칠 전, 상쾌하게 세안을 하고 나와 팩을 붙이려던 순간이었다. 뭐 하다가 정신이 팔렸는지 버젓이 꺼내 둔 팩을 보지도 못한 채 손은 자연스레 로션으로 향했다. 치덕치덕, 로션을 바르면서 아차, 팩을 하려고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쓰는 로션은 꽤 되직한 편이라 로션을 바르고 팩을 하는 건 좀 껄끄러웠다. 피부 장벽 위를 두껍고 꾸덕하게 덮은 로션 위에 팩을 붙여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습관이란 참 무섭다. 잠깐 정신을 팔았다기로서니 하려던 팩은 까맣게 잊고 바로 로션을 바를 줄이야.
그러고 보니 아주 짧은 찰나에 정신이 팔려 봉변을 당할 뻔한 게 비단 며칠 전의 일만은 아니었다. (팩 하기 전 로션 바른 걸 봉변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아무튼) 지난 주말이었다. 3층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1층에 내려와 결제하고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친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 뒤로 다른 사람들이 나오려고 하기에 길을 비켜주려고 발을 내디뎠다. 아뿔싸. 내가 서 있던 곳은 건물 입구로 이어지는 계단 바로 앞이었다.
내가 서 있는 입구 뒤로 사람들이 나온다 → 앞에 어떤 지형지물이 있는지 확인한다 → 입구 옆으로 비켜선다. 이 과정 사이에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한 과정이 끼어든다. 바로 '친구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인다.' 사실 이 정도야, 귀는 친구에게 열어 두고 시선은 내 앞에 있는 계단을 살피며 계단이 아닌 다른 빈 곳으로 몸을 쓱 옮기면 되는 정도다. 멀티 태스킹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이기에도 애매한 반사적 행동일 텐데, 멀티 태스킹 능력이 없는 난 귀를 열어 두느라 제 앞에 시선을 둘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애먼 발부터 앞으로 뻗었다.
3단 도약. 세 단짜리 계단 아래로 훅 떨어졌으니 3단 추락인가. 살짝만 뻗으면 되는 발은 왜 그렇게 쭉 뻗은 건지... 내디딘 발은 바로 앞의 한 단 아래를 디디지 않고 기어코 세 단을 단박에 가로질렀다. 멀티 태스킹 능력은 없어 서글프지만, 달팽이관과 대퇴근이 제 기능을 제 때 발휘해 그나마 덜 서글펐다. 쨍쨍한 균형 감각과 수려한 유연함으로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폴짝 뛰어올랐다가 사뿐히 착지하는 모양새로 세 단짜리 계단 아래에 착지하였...은 개뿔... 넘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발목이라도 접질렸어봐, 어휴...
탑재되지 않은 멀티 태스킹 능력을 문제 삼아야 할지, 주의력 결핍을 문제 삼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팩 하기 전 바른 로션과 지난 주말의 3단 도약 때문에 순간순간의 방심을 좀 덜어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