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00)
MBTI 극 J(계획형)인 주제에 요즘 즉흥여행에 맛들려 또 후루룩 대만을 다녀왔다. 김포발은 타이베이(쏭산 공항)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부산처럼 나라의 남부에 위치한 '가오슝'이란 도시에도 김포발 비행기가 있었다. 항공권 결제, 호텔 예약, ESIM 구매, 출발 이틀 전 일사천리로 해치워두고 환전은 가는 날 공항에서 하겠다는 요량으로 큰 여행 계획은 마쳤다.
그래도 J의 성향은 어디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틀 안에 여행 계획을 촘촘히 세워야 한다. 그나마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는', '네 맛도 내 맛이고 내 맛도 네 맛인' 단순하기 그지없는 미각의 소유자인지라 맛집까지 일일이 다 찾아두지 않는 성향을 지닌 건 참 다행이었다. 그렇게 급조했지만 제 나름 동선과 시간(관광지 오픈 시간과 이동 시간) 등을 잔뜩 고려해 선택된 첫 일정은 가오슝 도심에서 버스로 사십 분 정도 걸리는 '불광산'이라는 곳이었다.
가오슝 도심의 한 기차역에서 매시각 정각에 버스가 있었다. 아침에 미적거린 주제에 야무지게 아침까지 먹고 오느라 8시 출발 버스를 7시 59분에 탔다. 헐레벌떡. 버스가 자주 있으면 다음 버스 타면 되는데, 이 버스 놓치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극 J의 자아가 공들여 쌓아 놓은 여행일정 탑이 하나 둘 무너질 것이라는 조바심에 빠른 걸음과 달리기를 섞어 가며 겨우 버스 안으로 '세이프'를 하고 말았다.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나니 문득 대만에 와서도 내가 광역버스를 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경기 주민이면서 서울로 일을 나가다 보니 늘 광역버스를 탄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가는 버스를 탈 때도 있고, 마을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나가서 버스를 타기도 한다. 전자는 배차가 한 시간에 두 대 꼴. 후자는 심심하면 한 번씩 버스는 오지만 숫자 앞에 알파벳 M이 붙는 광역버스 중 무려 탑승률이 1위라 방심과 입석 금지의 콜라보에 걸리면 다음 버스를 타야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늘 버스를 탈 때 약간의 예민함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우선 배차가 현저히 적은 첫 번째 버스는 한 타임을 놓치면 하염없이 기다리는 건 둘째치고 지각 확정이므로 배차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나가야 한다는 강박감이 생긴다. 이번에 불광산 가는 버스 타던 모양새로 우다다 달려가서 1분 전에 탄 적도 있다.
두 번째 버스는 그나마 서울로 나갈 때는 괜찮다. 혹여 한 차를 보내도 5~10분 사이에 다음 차가 오니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다. 반대로 집으로 돌아올 땐 정류장에 도착한 순간 도사리고 있는 눈치게임의 오라가 확 느껴진다. 수많은 시내버스와 광역버스가 들르는 정류장이라 노선별로 탑승 대기줄을 서게끔 해두지 않은 곳인 데다가 버스가 넓디넓은 정류장의 앞쪽과 뒤쪽 중 어디에 설지도 그때그때 달라진다. 인파가 몰릴 땐 내가 탈 버스가 멈춰 선 곳으로 한 무리가 우르르 뛰어가는 광경을 목도하곤 한다. 지난 크리스마스이브도 그랬고. 체념한 채 좀 돌아가더라도 지하철을 타기로 했던 날이었다. 불광산 가는 후기를 찾아보니 주말에는 현지인이 예불 등을 드리러 많이 찾다 보니 정각 20분 전에 정류장에 가도 길게 줄을 서 있다고 한다. 불광산을 주말에 갔다면 1분 전에 정류장에 도착한 나는 꼼짝없이 자리가 없어 다음 차를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었고, 위 사진처럼 버스 내부도 어딘가 경기 광역버스랑 흡사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서인지 '내가 대만까지 와서 또 광역버스를 타는구나...'라는 묘하면서 헛헛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역시 어딜 가든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