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하기까지 걸린 72시간

캄보디아어 ជំរាបសួ / សួសី្ដ expr. 안녕하세요 / 안녕

by Fernweh

말을 모으는 여행기, 말.모.여. 34)


캄보디아어 ជំរាបសួ [쭘립쑤어] / សួសី្ដ[쑤어쓰다이] expr. 안녕하세요 / 안녕


앙코르와트 여행의 발이 되어 준 툭툭이 기사에게

'안녕하세요'에서 하세요-를 빼기까지 72시간이 걸렸다

존댓말과 반말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큐 3일 에세이


* 본문의 ‘바이욘’, ‘시엠립’은 외국어표기법 상 ‘바욘’, ‘시엠레아프’지만 더 많이 쓰이는 말로 표기했습니다.


0~24시간

소비엣. 툭툭이 기사의 이름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떠올라 기억하기 쉬웠다. 캄보디아 사람 이름을 들어본 적 없어 본명인지 별명인지 모르겠지만. 영어로 통성명한 그에게 '쭘립쑤어', 캄보디아어로 인사를 건네 본다. 그걸 듣곤 미소를 내비친다. 미소가 새어 나온 입 바로 아래로 합장을 한 채 인사를 되받아준다. 아차. 캄보디아에서도 태국, 라오스처럼 인사할 때 합장하는 게 예의인 걸 깜빡했다. 본의 아니게 범한 무례를 숨기려 후다닥 툭툭이에 탔다. 마침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와 비를 피해 툭툭이에 뛰어오르는 모습이 연출됐다.

DSC_0257.jpg 비를 뚫고 툭툭이를 모는 소비엣의 뒷모습


인사와 통성명 이후 소비엣과는 짧은 영어만이 오갔다. 매표소에 먼저 들러 달라, 앙코르 톰 남문 입구에 내려달라, 1시 반~2시 사이 문둥왕 테라스에서 보자 정도. 여행자와 툭툭이 기사 사이에 오가는 모범적인 비즈니스 회화였다.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인 만큼 문둥왕 테라스에서 다시 만났을 때 오전 일정이 어땠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친구였다면, 홀린 듯 자꾸만 쳐다본 바이욘 사원 사면상의 미소나 바푸온 사원에서 내려다본 참배로에 대한 감상을 나눴을 것이다.


앙코르 톰에 이어 첫날 마지막 일정으로 타 프롬 사원에 다녀온 후에야 조금 길어진 대화가 오갔다. 3일권을 끊었다는 말에 내일 기사를 부를 때 자신을 또 불러 달란다. 순간 소비엣은 본명이 아닐 거란 확신이 섰다. 연달아 툭툭이를 타야 하는 3일(혹은 7일)권을 이용하는 개인 여행자를 위해 외우기 쉬운 가명을 만든 듯했다. 자기 나름의 영업 노하우가 아닐까. 비 오는 와중에 고생했을 그를 위해 그러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DSC_0274.jpg
DSC_0341.jpg
DSC_0436.jpg
1일차 일정: 앙코르 톰 남문 - 바이욘 사원 - 바푸온 사원


25~48시간

다음 날 아침 로비에서 그를 만났다. 첫날의 결례를 만회하고자 턱 아래에 착, 손을 모았다. 합창도 발음도 뭔가 어색하지만 '쭘립쑤어', 전날처럼 캄보디아어 인사를 했다. 같은 동작으로 인사를 받아준 그는 'How are you?' 영어로 안부를 묻는다. 쭘립쑤어의 어색한 발음을 들으니 그 이상의 표현까지 캄보디아어로 알 정도는 아니라 판단한 모양이다.


둘째 날 일정은 길었다. 앙코르와트로 시작해 프놈 바켕에서의 일몰까지. 일몰을 보고 산에서 내려오면 해가 질 테니 하루를 꼬박 채워서 근무해야 하는 셈이었다. 사실 전날 소비엣은 예정보다 일찍 퇴근했다. 타 프롬 사원에서 호텔로 가지 않고 앙코르와트 사진을 취급하는 '맥더멋 갤러리'로 갔던 것. 관람 후 갤러리 앞 시엠립 강을 따라 걷다 시내를 거쳐 호텔로 갈 예정이어서 날 기다리려던 그를 먼저 보냈다. (하루 치 요금은 이미 결제했기에 제값을 못 받은 건 아니다) 전날 시간을 좀 벌었다고 다음 날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꼬박 일하라는 건 염치없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중간에 대기시간도 길고, 해지고 나야 운전이 끝날 텐데 괜찮을지도 함께 물었다. 시크하게 괜찮다고 말하며 출발할 채비를 한다. 하긴 앙코르와트를 찾는 사람이 오죽 많을까. 관광객을 한두 명 상대한 게 아닐 테니 저런 배려가 오히려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DSC_0705.jpg 이튿날도 역시 비가 왔다. 우기는 우기였나 보다.


앙코르와트를 나와 늦은 점심을 먹고 3시가 좀 넘어서 일몰 명소라는 프놈* 바켕으로 향했다. 일몰을 보러 가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하루 백 명으로 입장 인원을 제한해서 해 질 때를 맞춰 갈 수가 없었다. (그에게 대기시간이 길 거라 말한 이유기도 하다) 그나마 우기라, 즉 극성수기는 아니라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4시에 올라가도 된다는 말에 30분 정도 프놈 바켕 입구에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 '프놈'(ភ្នំ)은 크메르어로 산(山)이다. 일몰 보러 바켕 산에 오른 것.


캄보디아는 처음이냐는 질문으로 시작해 대화를 이어가던 중 학생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학생으로 봐준 건 고맙지만) "아니요." 단답형으로 말을 끊기 뭐해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예상외의 답변. 대학에서 계속 공부하려고 틈틈이 운전해 돈을 모은단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그만둔 공부를 다시 하려는 건지, 우리나라 대학생처럼 아르바이트해 등록금을 번다는 건지 자세한 내막은 짧은 대화만으로 알 수 없었다. 어떤 이유든, 내가 이미 지나온 시기를 겪어 내는 청년에게 무언의 격려를 보냈다.


참을 수 없는 어색한 침묵이 흘러 급히 캄보디아어로 화제를 바꿨다. 아침마다 어색하게 시도한 ‘쭘립쑤어’ 발음이 맞는지 물었다. 그 정도면 괜찮단다. 한글로 표기한 발음이 원래 소리와 완벽히 일치하진 않아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닌가 보다. 그러면서 알려 준 새 인사말.

쑤어쓰다이

쭘립쑤어는 존댓말(안녕하세요)이고 쑤어쓰다이는 친구 사이에 쓸 수 있는 반말(안녕)이었다. 자기한테는 쑤어쓰다이 해도 된다는 말을 붙였다.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가 잠깐의 대화로 허물어진 건가. 사적인 이야기가 좀 오갔으니 친근감을 느꼈을 수 있다. 아니면 학생인 자신이 더 어릴 테니 반말 인사를 하라는 건가. 프랑스에선 딱 보기에 동년배면 초면이라도 말을 놓는데, 그런 문화적 차이려나. 프놈 바켕을 오르며 '쭘립쑤어'를 '쑤어쓰다이'로 만든 원천이 뭔지 궁금해졌다. 호텔에 도착한 후 팁을 두둑이 쥐여 보냈다. 삶을 씩씩히 일궈 내는 성실함, 말을 놓으라며 보여준 마음의 넉넉함,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고마움이 쌓인 팁이었다.

DSC_0835.jpg
DSC_0617.jpg
DSC_0635.jpg
2일차 일정: 앙코르와트(중앙 성소) - 프놈바켕에 올라 본 앙코르와트 - 일몰


49~72시간

원래의 계획: 앙코르와트 일출 보기. 일몰 다음 날 일출이라니. 툭툭이 기사에게 최악의 스케줄이다. 예정대로라면 새벽 3시 반 픽업 예정이었으나 다른 날처럼 9시로 미뤘다. 호텔 직원이 가운데 탑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기엔 날짜가 이르다 했고, 역시 비 예보가 있었기 때문. 비구름에 일출은 보이지도 않을 테고, 이틀 동안 쌓인 피로에 일출 대신 수면을 택했다.


한 번 여행 의지가 꺾이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시내만 잠깐 구경하려다 앙코르와트를 다시 가기로 했다. 시간을 한 번 미룬 주제에 인제 와서 취소까지 해 버리면 소비엣 입장에서는 하루를 공치는 게 될 테니 그럴 수 없었다.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쭘립쑤어와 쑤어쓰다이, 어떤 말을 할지 갈팡질팡했다. 잠을 오래 잤더니 멍한 상태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엉겁결에 '헬로우', 영어를 뱉었다. 기껏 배운 새 표현을 쓸 기회를 날렸다. 3일간 보며 조금은 허물어진 낯선 분위기가 다시 첫날의 비즈니스 관계로 회귀했다. 친구 사이에 쓴다는 '쑤어쓰다이'가 영어로 회귀한 것처럼. 이후 나눈 대화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게 전부였다. 쑤어쓰다이를 허락한 마음을 기억하고 있다고 티 내고 싶었던 걸까. '반띠아이 끄데이' 사원 앞 행상에서 음료수를 두 개 사서 하나를 건넸다. 이번엔 내 쪽에서 친근함의 표시를 해 보인 것. 픽업 시간을 갑자기 미룬 점이 미안하기도 했고.

DSC_0753.jpg
DSC_0559.jpg
DSC_0564.jpg
(바뀐) 3일차 일정: 다시 앙코르와트 - 스라 스랑(옛 왕실 목욕탕 터) - 반띠에이 끄레이 사원



그를 다시 만난 건 자정, 공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캐리어를 싣는 그에게 늦었지만 '쑤어쓰다이', 알려준 인사를 건넸다. 오후까지 함께 있다 다시 만난 건데 꼭 처음 만난 것처럼 인사하는 게 좀 이상했지만, '쑤어쓰다이' 를 할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이었다. 소비엣은 첫날 '쭘립쑤어'를 듣고 보인 미소보다 큰 웃음을 지었다. 헤어질 때 인사를 캄보디아어로 몰라 공항에서 영어 인사를 하며 헤어졌지만, 아무쪼록 쑤어쓰다이의 안녕한 마음이 잘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쭘립.gif 쭘립쑤어 그리고 쑤어쓰다이 (클릭하면 끝까지 재생)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