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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Dec 22. 2020

자기 앞의 생 / 데미안

La vie devant soi / Demian

  두 소설의 공통점이 있다. 필명으로 쓰여졌다는 점. 그 필명 뒤에 숨은 작가는 이미 유명한 작가였다는 점.  



프랑스 소설 <자기 앞의생>, 에밀 아자르 (Emile Ajar), 로맹 가리 (Romain Gary)

독일 소설 <데미안>, 에밀 싱클레어 (Emil Sinclaire),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이미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던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출간, 또 한 번 공쿠르상을 받게 된다. (공쿠르상은 수상했던 작가에게 상을 주지 않는데, 로맹 가리 사후 그가 에밀 아자르였음이 밝혀졌기에 두 차례 수상이 가능했다.) 


헤르만 헤세는 1차 대전 참전 후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정신과 치료를 통해 자아를 분리시켜 관찰하는 방법으로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려 에밀 싱클레어라는 제 2의 자아를 만들게 되었다. 데미안 역시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 상'을 수상하였으니, 두 작품의 공통점이 계속 나온다. 심지어 필명은 둘 모두 '에밀'이었다. (언어가 달라 철자는 다르지만)

  작품 외적에서 공통점이 드러났다면, 내적인 요소로는 시점에서부터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데미안>은 성인이 된 주인공 '싱클레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한 고뇌를 통해 성장해가는 이야기지만, <자기 앞의 생>은 열 몇살짜리 아이 '모모'의 시선에서 자신을 돌봐주는 로자 아주머니와의 소외되고 척박한 삶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이다. 아무래도 읽고 나서 가슴에 뭔가 서글픈 여운을 남긴 건 <자기 앞의 생>이었다. 열 살, 그러니까 초등학생 3~4학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겪는 일 - 창녀인 어머니에게 버려져 로자 아주머니에게 거둬진 일, 평생 자신과 함께할 줄 알았던 로자 아주머니가 점점 죽어가는 일 등 - 과 아랍인(모모), 유대인(로자 아주머니), 창녀의 자식들이란 인물 설정을 둘러싼 냉담한 현실을 감당해 내는 걸 보는 게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여도 충분히 삶이 행복하지 않은 걸 느낄 수 있다. 그런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 어른들에게 뭔가를 물어봐도 '넌 아직 어리니 몰라도 된단다'란 답만 돌아온다. 거지같은 삶이 뭔지 몰라도 될 나이의 '모모'라도 거지같은 삶을 살아내지 않을 순 없는데 말이다. 유복한 가정 속의 어린 양 같은 착한 아이로만 살던 <데미안>의 '싱클레어'도 내면의 어두운 세계를 만났을 때 꽤나 혼란스러워 한다. 동네 양아치에게 괜한 거짓말을 했다가 도둑질을 하게 되기도 하고, 굳건히 뿌리내린 줄로만 알았던 신에 대한 믿음도 '데미안'이 들려준 카인의 표적에 대한 이야기에 흔들려 괴로워한다. 하지만 '싱클레어'의 주변 인물은 '넌 몰라도 돼', 하고 마는 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싱클레어'가 그러한 내면의 고뇌를 극복하게끔 돕는다는게, <자기 앞의 생>의 '모모'와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데미안> 속 이야기가 약간은 초현실적으로 그려졌다는 점도 책을 읽은 후 남은 감정이 <자기 앞의 생>보다 덜 선명한 이유였으리라. '싱클레어'의 내면적 고뇌에 대한 답은 <자기 앞의 생>에서처럼,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찾아온다는 등의 일련의 사건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데미안'이 쓱 다가와 예언자가 된 마냥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는 식이다. '싱클레어'는 몇 번이고 너무나도 신비한 존재인 '데미안'의 존재를 곱씹으며 내면의 갈등을 풀어나간다. 그래서인지 선명한 여운을 남기진 않지만, 여운을 묘하게 흩뿌리고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운이라기보단 인간 내면의 선-악의 대립 같은 생각해봄 직한 철학적 사유를 남겼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역시 고전은 고전인가, 싶은 부분이었다. (누가 보면 고전 명작 많이 읽는 줄......)


 

누구도 감지하지 못한 이런 체험으로 우리들의 운명에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이 그어져 간다. 그런 칼질과 균열은 점점 늘어나고 아물고 잊혀져 가지만, 우리 마음속 가장 비밀스러운 암실에서는 여전히 살아남아 계속 피를 흘린다. 

눈부신 빛의 상실은 유년 시절의 상실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어서, 사람은 어느 정도의 영혼의 자유와 성인의 대가로 이 사랑스러운 빛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체념하는 데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 

playlist♪ Gustav holst - The planet Op.32


Moi je souriais, mais à l'intérieur j'avais envie de crever. Des fois je sens que la vie, c'est pas ça, c'est pas du tout ça.

(나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죽고 싶었다. 

가끔 나는 인생은, 이게 아니라고, 이런 게 전혀 아니라고 느낀다.)

Il ne faut pas pleurer, mon petit, c'est naturel que les vieux meurent. 

Tu as toute la vie devant toi.

(울지 말렴, 아가야, 늙은이들이 죽는 건 당연하단다. 너는 너의 앞에 생이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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