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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ON FAVORI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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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an 19. 2021

파리 헬스장에서 절단기를 받아 들다

프랑스의 네 도시 탐방기, 몽파보리(2-2)






   누가. 도대체 누가. 해외 생활을 하면 살이 빠진다고 했는가. 신빙성이 꽤 있어 보이던 이 소문은 내 옆구리만큼은 비껴갔고, 옆구리 사이의 틈새에는 밀가루로 다져진 지방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하긴. 빵집 들른 김에 2~3일 치 빵을 미리 사둔다며 집어 든 크루아상 4개, 뺑오쇼콜라 4개를 그날 다 (처)먹었으니 살이 빠질 리가... 결국 헬스장을 등록했다.     

   

   파리의 헬스장 라커룸 이용 방식은 우리나라랑 좀 달랐다. 한국에서 다니던 헬스장은 돈을 내고 추가한 개인 라커에 자물쇠가 딸려 있었다. 프랑스 헬스장도 개인 라커를 추가할 수 있지만, 자물쇠는 개인이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탈의실 입구와 샤워장 가운데에 있는 왼쪽에서 여섯 번째 라커 중 허리를 숙여 짐을 넣었다 뺐다 할 필요 없는 위쪽 라커를 꼭 쓰겠다는 게 아니라면 추가 요금 12유로(≒15,000원)를 내면서까지 굳이 라커를 쓸 필요는 없다.


   등록 후 헬스장에 처음 갈 때 여분의 자물쇠를 챙겨 갔다. 회전식 번호 자물쇠였는데 크기가 너무 작아 라커 열쇠 구멍에 들어맞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판매용 자물쇠를 구비해 둔 건 장사치의 상술로 봐야 하나, 고객 서비스의 일환으로 봐야 하나... 괜한 돈(5유로였나 10유로였나)을 주고 투박한 맹꽁이자물쇠를 사야 했다. 회전식이 아니라서 라커 열쇠를 늘 챙겨야 했다.


   때는 바야흐로 2월의 어느 날. 전날 빨고 건조대에 널어 둔 긴 운동복 바지에 손을 대는 순간 미처 기화되지 않은 물기가 찰싹, 손끝을 때렸다. 운동을 하루 쉬라는 신의 계시로 여기고 싶었지만 아래로 축 늘어진 바지를 따라 고개를 숙이니 옆구리를 채우다 못해 앞으로 밀려 나오는 뱃살이 보였다. ‘흐읍’, 배를 집어넣으려 크게 들이쉰 숨을 머리까지 밀어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름 내내 입고 서랍 어딘가에 쑤셔 박아둔 반바지를 챙겨 들고 헬스장에 향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 긴 바지 주머니에는 지퍼가 달려 있지만 반바지 주머니에는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자물쇠 열쇠를 지퍼도 없는 주머니에 대충 넣고는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을 마치고 라커룸에 돌아왔을 때 이미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필 헬스장에 오기 전에 본 툭 튀어나온 뱃살에 충격을 받은 날이라 복근 운동을 했는데,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안 열쇠가 떨어졌을 거란 생각에 복근 운동을 했던 GX룸부터 갔다. 열쇠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운동 순서의 역순으로 헬스장을 빙 두르며 기웃대도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아 헤매다 포기하고 프런트로 가 내 부주의에 관한 고해성사를 했다.


   헬스장에서 파는 자물쇠니, 마스터키가 있을 거란 기대는 착각이었다. 마스터키는 개뿔, 직원이 창고에서 꺼내 온 건 내 상반신만 한 커다란 절단기였다. 절단기를 받아 들고 라커룸에 들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절단기에 꽂힌다. 양날이 교차하여 뭔가를 잘라내는 모양새가 남자에게 본능적인 위협이 됐는지, 다들 시선을 거두고 못 본 척 몸단장을 이어나갔다. 절단기로 자물쇠 윗부분의 금속을 낑낑대며 자르는 모습에 ‘열쇠를 잃어버렸나 보네’라는 무언의 위로가 스치고, ‘좀 도와드려요?’라는 찰나의 배려가 스쳤다.



   몇 분의 사투 끝에 자물쇠를 끊었다. 절단기를 반납하며 5유로(10유로였나)를 또 내고 새 자물쇠를 사던 기분은 잘려나간 자물쇠 윗부분의 단면처럼 매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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