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MON FAVORI 1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rnweh Jan 19. 2021

리옹 에어비앤비에서 축구를 보다

프랑스의 네 도시 탐방기, 몽파보리(2-4)








   ‘숙소에서 축구 보기’는 글로 남길 만큼 특별한 사건은 아닐 수 있다. 아무리 이날 본 경기가 2018년 월드컵 결승 경기라고 해도 말이다. 얼마나 대단한 경기였는가는 중요치 않다. ‘내’가 축구를 봤다는 게 중요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지막으로 본 축구 경기가 무려 2002년 월드컵 8강전이었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한 관심은 축구의 ㅊ 자, 아니 자음 치읓을 지읒에서 만들어 내기 위해 더한 짧은 획만큼도 없다. 박지성이 월드컵에서 보인 활약을 프리미어 리그에서 ‘파크 지 서웅’(PARK JI SUNG)으로 이어가던 당시에 했던 내 황당무개한 발언이 코딱지만큼도 없는 관심의 증거라면 증거인데... 박지성의 경기가 있던 날, 땀냄새풀풀 나는 남고 교실을 가득 채운 건 축구 이야기였다. 평소에도 밥 먹고 축구하고, 수업 끝나고 집에 가다가도 축구하고, 플스방에서도 위닝 일레븐을 하던 애들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왠지 저 날만큼은 소외감을 느꼈다. ‘맨유’가 어쩌고, 박지성이 ‘맨유’에서 저쩌고, ‘맨유’가 어느 팀을 상대로 어쩌고저쩌고. 축구 경기로 물꼬가 튼 대화에 반복적으로 나오던 ‘맨유’가 귀에 거슬렸다. 대화가 잠시 끊겼을 때 이때다 싶어 훅 멘트를 날렸다.


   야, 박지성 맨유 아니거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이잖아! 

   

  체감상 2년 정도였던 2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걸 개그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가, 당황해하던 친구들의 표정이 여전히 또렷하다. 정말로, 진짜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줄임말이 맨유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할 만큼 난 축구 문외한이었다.


   저런 문외한이 별안간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어 내 집 안방도 아닌 리옹 여행 중에 축구를 본 걸까. 심경의 변화 따위는 없었다. 여전히 축구는 무지의 영역이었지만 2018년 7월 15일엔 축구 보기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시내에 나갈까 했지만, 리옹 시가지인 벨쿠르(Bellecour)광장을 비롯한 주요 시가지엔 이미 프랑스의 우승 순간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인파가 가득해서 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여길 가도 축구, 저길 가도 축구인 날이니 이날 하루는 숙소에서 쉬자는 마음으로 TV를 틀었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채널이 프랑스가 진출한 결승전을 중계하고 있었다.


여행 중이던 리옹은 아니지만, 결승전 당시 파리 개선문의 모습. (2002년 광화문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날 프랑스 전역에는 축제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었다. 결승전 하루 전날이었던 7월 14일은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는 프랑스 최대 공휴일 ‘혁명 기념일’이라서 이미 분위기는 고양되어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가 월드컵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감히 비유하자면, 광복절 100주년을 기념해 성대한 행사를 치른 다음 날, 우리나라 대표팀이 일본을 상대로 월드컵 경기에서 승리를 따내기 직전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만약 그런 날이라면 타지에 있더라도 빨간 티셔츠를 어떻게든 구해 입고 야외 응원에 동참했겠지만, 타국과 타국의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수십만 인파가 도사린 광란의 현장에 가고 싶진 않았다. (프랑스가 우승을 확정짓고 연신 보도되던, 시내를 가득 차운 인파를 비추는 뉴스를 보며 안 가길 잘했다고 안도했다.)


결승전 전날은 프랑스의 최대 공휴일인 혁명기념일이었다. 리옹에서도 성대한 불꽃놀이가 열렸다.


   이쯤에서 이실직고하자면 경기를 제대로 본 건 아니었다. 경기 종료 10분 전쯤부터 누가 우승하나~ 하고 슬쩍 들여다본 게 전부라서 봤다고 하기가 좀 부끄럽다. ‘월드컵 결승’이란 타이틀은 나 같은 인간에겐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승의 순간을 사진에 담아둔 건, 축구팬으로서가 아닌 여행의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고자 하는 여행자로서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다.


여행하던 나라가 월드컵 우승컵을 거머쥔 날로 기억하자는 마음으로 사진을 남겼다.


이전 10화 보르도 근교에서 헛물을 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