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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ON FAVORI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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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Jan 23. 2021

보르도- 말고 시그나기에서 산, 마시지 못한 와인

몽파보리 외전(1) 와인 대신 무릎을 내어 준 이야기

   조지아 트빌리시에서는 사장님이 한국인이라 어쩌다 보니 한인 게스트하우스가 된 곳에서 숙박을 했다. 평점은 제일 높은데 가격이 제일 낮아 덥석 예약한 거라 한국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을 줄도, 거의 매일 저녁 한식을 먹을 줄도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각자의 일정을 소화하고 저녁에 모여 저녁상을 차리는 모습은 일을 마치고 집에 와 밥을 차리던 한국의 일상과 겹쳐졌다.


  트빌리시는 대개 일정을 넉넉히 잡고 오는 곳이라 며칠간 한 식탁에서 밥을 먹으니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언제부터인가 저녁 즈음이면 하나둘 주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차려진 식탁에는 항상 와인이 빠지지 않았다. 물가가 워낙 저렴해 식사에 곁들일 병 와인도 별로 안 비쌌고, 마트에는 생맥주를 배달시키면 담기는 갈색 페트병에 담긴, 이렇게 싸도 되나 싶은 와인도 있었다. 가격 부담이 덜해서인지 오늘 저녁엔 와인을 마시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누구 한명은 꼭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오다 주웠, 아니 ‘오다 사온’ 와인을 저녁상에 툭툭 꺼내 놓았다. 술이 세진 않아 많이 마시진 못했지만 일단 얻어먹은 건 얻어먹은 거니 입을 싹 닫을 순 없었다. 마침 조지아 내에서도 와인으로 유명한 ‘시그나기’란 지역에 당일 투어를 다녀오는 날이라 와이너리에서 괜찮은 와인 한 병을 사 와야겠다고, 나도 츤데레처럼 ‘오다 샀어요’ 하고 와인을 꺼내놓겠다는 마음을 먹은 채 시그나기를 다녀왔다.


3라리(=1,000원)이면 저런 와인을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다.


   투어는 시그나기 시내를 반나절 보고 다시 트빌리시로 오는 길에 와이너리에 들르는 일정. 조지아에서는 ‘크베브리’(Kvevri)라는 전통 항아리에 와인을 담는단다. 다만 우리가 들른 곳은 ‘자.낳.와’(자본주의가 낳은 와이너리)로 이미 현대식으로 개조된 터라 크베브리는 장식으로만 봤고, 보르도 와이너리 투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투어였다. 마지막 일정 역시 별반 다를 게 없는 와인 숍에서의 쇼핑. 거기서 ‘키시(kisi) 품종의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오늘 저녁의 오다 산 와인으로 골랐다.


   테이스팅 했던 와인은 아니었지만 순전히 이름이 예뻐 고른 와인. 이름에서 우러난 예쁨을 지켜줬어야 하는데, 주책맞은 나란 인간 때문에 예쁨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숙소로 돌아가던 대로 한복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인도로 올라서다 미세하게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그대로 고꾸라졌다. 와인을 백팩에 넣었다면, 무릎은 까졌더라도 와인만은 지켰을 텐데... 봉투째 들고 오던 와인은 고꾸라지는 몸의 반동으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현장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럴 땐 아픔보다는 창피함을 먼저 느낀다. 후다닥 자리를 뜨려 빠른 걸음을 내딛는데 그 걸음 사이사이로 액체가 줄줄 흐른다. 창피함이 배가 되는 찰나, 깨진 와인은 어떻게도 수습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 앞에 있던 쓰레기통에 와인을 봉투째 쑤셔 넣고 빠른 걸음을 이어나갔다.


   넘어져 무릎이 까진 꼬마아이가 집에 올 땐 씩씩한 척하다 엄마를 보면 서러움을 토해내듯, 트빌리시 저녁 식구가 한 명씩 숙소로 돌아올 때면 함께 마실 와인을 샀는데 와인이 사라졌다고 성토했다. 매번 무릎을 까 보인 건 정말 그 와인이, 한 컵 정도의 양은 숙소 앞 거리에 눌러붙어 있는 와인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이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숴져 버린 와인을 잊으려 넷이 모여 와인바로 갔던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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