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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Mar 06. 2021

화를 냈다, 처음으로

여행에세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동기 넷이 의기투합하여 러시아 여행을 떠났다. 그때만 해도 여전히 러시아 여행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당시 러시아 여행을 위해선 비자가 필요했다(!) (다녀오고 얼마 안 되 무비자 협정이 체결된 건 좀 억울했다...) <러시아 문화와 예술>이란 교양 수업을 같이 듣던 우린 '암, 겨울엔 자고로 러시아를 다녀와야지'라는 허세를 부리며 2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에 러시아를 다녀오기로 했다. 아주 잠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혹하기도 했으나 우리의 여행 스타일과는 맞지 않은 듯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만 다녀오는 일정으로 입을 맞췄다. 


 '다 필요 없고 키릴 문자는 알파벳이라도 꼭 떼고 가라. 라틴 알파벳 병기를 기대했다간 큰 코 다친다'는 교수님의 엄포에 넷 중 외국어에 관심이 많던 내가 짬짬히 키릴 문자를 독파했다. 실제로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키릴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게 어마어마한 능력이 되었다. 대중교통엔 로마자 알파벳이 정말 없었다. (지금은 있단다.) 지하철, 버스부터 길거리 간판이나 골목 이름까지 내 식대로 막 읽긴 했지만 어쨌든 초행길의 여행 무리에게 장애요소로 작용될만한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훅 흘러 모스크바 여행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이하 줄여서 '상트')로 넘어 왔다. 상트에서도 의도치 않게 길잡이 역할을 했다. 길잡이라고 그럴싸하게 써 놓았지만 정류장이나 길 이름을 읽어 내고, 가려는 곳이 여기가 맞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세 명의 친구들이 어느 순간부터 날 가이드처럼 의지했다. 가이드라기엔 현지인과 소통할 수도 없다거나 방문하는 관광지에 잘 알지도 못한다는 점은 그들과 매한가지여서 따로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진 않았다.


 여기에 우리 모두의 두루뭉술한 여행 스타일도 그때까지 의견 충돌이 없던 데 일조했다. 그때의 여행 기조라면 가고 싶은 곳을 '가면 가고 못 가면 말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먹고 안 되면 말고' 이런 식이었다. 계획이 크게 틀어졌어도 그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예정된 일정 중간 중간 하고 싶은 게 생겨 누군가 의견을 제시하면 다들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서로가 서로에게 불평하거나 화를 낼 일이 전혀 생길 수 없는 구조였다.


 상트 여행 3일째. 불평의 싹조차 트지 않을 분위기에서 난 화를 내고 말았다. 러시아 여행 기간을 통틀어 처음으로. (덧붙이자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날, 상트 근교의 예카테리나 여름 궁전에 가기로 했다. 여름 궁전은 꽤 유명한 관광지지만, 당시만해도 뚜벅이 여행자가 찾아가기에 그리 쉬운 코스는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 터미널(이라기엔 그저 주차장 같았지만 아무튼)로 가서 여름 궁전행 '승합 버스'(Маршрутка, 마르슈트카)를 타고 여름 궁전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코스. 지하철 탑승이야 뭐 식은 죽 먹기였고, 12인승 승합차량이 버스로 운행되는 시스템은 좀 어색했지만 미리 검색해 둔 버스 번호가 앞 유리에 떡하니 붙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쉽게 찾아 탈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내려야 할 정류장 이름을 키릴 문자로 알아 두었지만, 버스 안 오래된 노선도는 떼가 타고 색이 바래 글씨가 다 지워져 있었다. 안내 방송이 나왔지만 그걸 캐치해 내는 건 내 능력 밖이었다. 러시아어는 단어의 강세 위치의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 키릴 문자로 적어 놓은 정류장 이름에 실제 강세가 붙어 발음되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된다. (내가 적어 둔 게 '여름 궁전'이지만 실제 발음은 '이룸 궁진'이 되는 식. 한글로 써 놓으니 눈치껏 때려 맞출 수 있을 거 같지만, 키릴 문자만 아는 애가 '짜르스코예 슬로'(Царское Село)'라는 정류장 이름의 이형태까지 캐치하긴 불가능에 가까웠다.)

 

 데이터도 터지지 않아 지도에서도 여름 궁전 근처까지 왔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기사에게, 다른 승객에게 '여름 궁전'을 애타게 불러 봐도 그들에게 여름 궁전은 '이름 궁진'이었기에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버스가 지나는 관광지야 그 곳 하나였고, 우리의 행색이 딱 여행자였으니 눈치껏 알아려줬을 법도 한데 말이다.) 혼자 전전긍긍하다 머리라도 맞대야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친구들을 찾았다. 거기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셋 모두 '길잡이'인 나를 믿고 아주 평온하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깨를 격하게 흔들며 깨우고서 가이드도 아닌데 혼자 정류장 찾는다고 난리쳐야 하냐고, 너넨 왜 아무 신경도 안 쓰고 퍼질러 잠만 자냐며 버럭 화를 냈다. 잠이 덜 깬 건지, 자다 깼는데 공룡 한 마리가(난 공룡상이다...) 화내고 있어 당황한 건지, 멍한 동기들을 닥달해 이제 내리면 되지 않을까- 하고 입을 모은 곳에서 내렸다. 


 내려야 할 곳에서 두 정거장이나 지나서 내렸다는 점에, 전날 눈이 (또) 잔뜩 내려 발이 푹푹 들어가는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점에 동기들에게 줄창 툴툴대고 말았다.


정류장을 잘못 내려 눈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했다.


 다행히 우린 앞서 말했듯 '두루뭉술' 패시브 스킬을 장착하고 있어서 여름 궁전에 도착하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처럼 즐겁게 관광을 했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서 '피곤하면 잘 수도 있지', '화 낼만 했지'라고 이해하며 솔직한 감정을 털어 놓으니 뒷끝이 남지 않았다. 정류장을 잘못 내린 덕분에 한 오랜 눈밭 산책 때문이였는지 마음 속 화도 어느새 뽀드득, 뽀드득 누그러졌다. 


기대했던 황금색 쿠폴은 공사 중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몇 십분을 걸어와 여름 궁전에 도착했는데... 보고 싶었던 황금색 돔(쿠폴)이 공사중... 또 한번 마음에 불길이 스쳤지만 '아니 뭐 못 보면 말고'라는 마음으로 황금빛 돔을 마음에 묻고는 즐거운 마음만 가져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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