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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오랜만에 내린 봄비가 알려준 것들

by 강석효

실로 오랜만에 봄비가 내렸다. 기다렸던 사람처럼, 그리움이 담긴 편지처럼 조용히, 그러나 땅 깊이 스며드는 봄비였다. 오래 마른 땅은 빗방울을 만나자마자 숨을 쉬었고, 창밖의 풀들은 그제야 비로소 제 빛깔을 찾았다. 창가에 가만히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참 고맙다. 이처럼 필요한 순간에 조용히 찾아와주는 것들. 봄비도, 사람도, 마음도.


이 봄비는 유난히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지붕 누수. 천장 귀퉁이에서 물이 스며들고, 벽지에 얼룩이 생기던 그날 이후로 나는 셀 수 없이 지붕을 올랐다. 아스팔트 싱글 하나하나를 들춰보며 틈을 찾았고, 손에 실리콘 총을 들고선 마음까지 다잡았다. 하지만 비는 속을 알 수 없는 손님 같아서, 손 본 곳이 진짜 원인이었는지는 늘 다음 비를 기다려야만 알 수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다시 사다리를 폈다. 햇살에 바랜 싱글 조각 사이, 미세하게 벌어진 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람도 흙먼지도 아닌, 세월의 입김이 남긴 작은 틈이었다. 나는 그 자리를 조심스럽게 메웠다. 마치 오래된 상처를 꿰매듯, ‘이제 그만 새자’ 하고 마음으로 다독이며.


그리고 오늘, 마침내 비가 내렸다.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지붕 위에서 고요히 사라졌고, 천장은 말끔했다. 벽지도, 바닥도, 내 마음도 더는 젖지 않았다. 아, 이 얼마나 안도하고 감사한 일인가. 비가 내려도 새지 않는 집. 그 사실 하나로 나는 하루 종일 마음이 포근했다. 아무도 모를 작고 조용한 승리였지만, 내겐 참 큰 기쁨이었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아이들이 돌아온다. 준서와 서정이. 현관문이 열리고 “아빠!”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집 안이 한층 밝아진다. 서정이는 요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산다. “아빠, 양관식이 알죠? 진짜 감동이에요. 말은 잘 못 해도 마음은 다 전해지잖아요. 아내 생각하는 그 눈빛, 너무 짠하고 멋있어요.” 감정에 몰입한 눈빛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들려주는 서정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 아이 안에도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그 사이 준서는 말없이 냉장고 문을 연다. 시원한 음료 한 병을 꺼내어 뚜껑을 툭 따더니, “이거 마셔도 되죠?” 하고 묻는다. “그래, 시원하게 마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엌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보리떡 막 쪘어! 따뜻할 때 얼른 와서 먹어!”


금세 상 위에 놓인 보리떡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갈색 떡 안에는 소박하게 박힌 완두콩들이 몽글몽글 보였다. 아이들은 조각 하나씩 손에 들고 후후 불며 입에 넣었다. “우와, 진짜 맛있다!” 서정이가 말하자, 준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나는 아내를 바라보며 슬며시 웃었다. 바쁜 하루의 끝에, 시원한 음료 한 병과 따끈한 보리떡 한 조각이 우리에게는 가장 확실한 위로였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삶은 이런 거구나. 거창한 말보다, 갓 쪄낸 떡 안에 든 완두콩처럼 소박하고 포근한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하루가 되고, 계절이 되고, 인생이 되는 거구나.


그리고 주일 아침. 우리는 언제나처럼 함께 교회당으로 향한다.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나서는 서정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성경책을 든 준서, 그리고 나와 아내. 네 식구가 나란히 걷는 그 길은 그저 길이 아니었다. 우리의 믿음과 시간을 연결해주는, 매주 새롭게 이어지는 약속 같은 길이었다.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나는 속으로 또 한 번 고백한다. ‘오늘도 우리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봄비는 그저 식물만 자라게 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도 적셨고, 가족의 틈도 메워주었으며, 내 안의 작고 오래된 불안을 조용히 닦아주었다. 다시는 지붕을 오르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 따뜻한 떡 한 조각을 나눌 수 있는 평화.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기쁨. 봄비가 내게 전해준 건 결국, 그런 ‘삶’이었다.


창을 열면 수선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반긴다. 보랏빛의 키 작은 튤립은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작년에 가지를 많이 친 탓에 딱 한 송이만 피운 분꽃은 그럼에도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그 옆, 마당과 인도의 경계를 따라 줄지어 선 미스김 라일락들.
이제 막 올라온 꽃망울들이 보랏빛 향기를 숨기지 못하고 있다.


작고 단정한 그 나무들은 담장을 대신해 제 자리를 지키며, 집과 세상 사이를 은은한 향기로 이어주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이 봄날에, 조용히 마음속으로 인사한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새지 않는 하루를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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