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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 풀

계단과 계산 사이에 작은 틈사이에 핀 꽃 이야기

by 강석효

예배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그중에서도 세 번째 계단 모퉁이에,
사람들의 눈길 하나 잘 머물지 않는 그 틈새에
작은 풀 하나가 살고 있었다.


꽃도 없고 향도 없는,
그저 가느다란 초록빛줄기 하나.
이름도 없이,
누구도 불러주지 않아

그저 ‘돌계단 풀’이라 부르기로 했다.


왜냐하면
바람이 어느 봄날, 조심스레 데리고 온 씨앗 하나가
그 돌 사이 어둡고 메마른 흙 위에 떨어졌고,
그곳을 살아갈 자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름을 거창하게 붙일 것도 없이,
‘돌계단 풀’이면 족하지 않겠느냐.


그날도 해는 높았고,
돌계단 아래 담벼락 화단에서는
장미가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햇살을 한껏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던 장미가 고개를 삐죽 내밀더니,
돌계단 풀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얘야, 넌 참 운이 없는 아이구나.
하필 그런 데서 살다니,
평생 꽃도 못 피겠는걸?
나처럼 기름지고 향기로운 흙에 뿌리내려야지,

왜 그런 돌 사이에 매달려 있니.”


돌계단 풀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가... 정말 그렇게 부족한 존재일까?”

혼잣말을 삼키며, 그 밤 돌계단 풀은 울었다.


비가 왔다.
천둥도 잠깐, 소리 없이 쏟아지던 비.
세상 모든 눈물을 대신해 줄 것만 같은 비.
그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날 밤, 돌계단 풀이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는 몰랐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은 깨끗했고, 공기는 새로웠다.
봉숭아도, 튤립도, 모두들 비에 씻긴 몸으로 더 화사해졌고.

하지만 돌계단 풀은 여전히 시무룩했다.
“나는 꽃도 피지 못할 테고,
어쩌면 내 존재는, 그저 무의미한 걸지도 몰라.”


그렇게 스스로를 꾸짖으며, 더 깊숙이 웅크렸다.


그때였다.
예배당으로 오르시던 한 할머니가 계단에 잠시 앉으셨다.
작은 숨을 고르며, 무심코 계단 틈새를 바라보다가
그 풀을 보셨다.


“어머나, 채송화 아니냐?
아니 이렇게 기특할 수가!
이 돌 사이에서도 버텨내고 있었구나.
그래,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렴.
내가 도와줄 테니, 아주 예쁜 꽃을 피우게 될 거란다.”


그 말은, 처음 듣는 따뜻한 위로였다.
사람의 눈에, 그것도 늙고 주름진 눈동자에
자신이 담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돌계단 풀은 처음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기도하러 오실 때마다
풀을 물끄러미 바라보셨고,
말을 걸어주셨고,
때로는 물컵에 조심스레 물을 담아와 부어주셨다.


하루는 손녀 태희와 함께 오셨는데,
작은 손에 물컵을 들고 온 태희는
채송화를 보며 속삭였다.


“채송화야,
할머니가 매일 너를 위해 기도하셔.
넌 참 특별하고 멋진 아이래.
나도 널 위해 기도할게.”

그날 돌계단 풀은,
그 조그만 속삭임이 바람결에 머리를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기쁘고 따뜻하고,
마치 햇살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났다.


장터에서 풀빵을 팔고 쉬러 오던 민지 엄마가
돌계단 아래에 잠시 앉으셨다.
지친 하루, 무거운 짐들, 뜨거운 햇살.


그런데, 그 순간
돌계단 틈 사이에서 피어난 작고도 환한 채송화가
민지 엄마의 눈에 들어왔다.


“어머나…
이런 데서도 꽃이 피는구나.
이렇게 조그만 아이도 버텨서 꽃을 피우는데,
나도 민지를 위해 다시 힘을 내야겠구나.
그래, 고마워. 예쁜 채송화야.”


그 말에,
돌계단 풀은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번엔, 기쁨의 눈물.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었구나.’


그날 이후로,
돌계단 풀은 더 이상 자신을 ‘운 없는 풀’이라 부르지 않았다.
누군가의 눈길을 머무르게 하고,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위로를 심어주는 풀.


바로,
세상 어디에도 없을

‘돌계단 채송화’가 된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그 돌계단 틈처럼 좁고, 거칠고, 숨 막히는 자리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자리에서 자라야 할지도 모른다.
꽃을 피울 수 없다고 믿으며
수많은 장미와 튤립 사이에서 초라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그 자리에 피어난 작은 생명을 보고
자신의 하루를 다시 일으킬 용기를 얻는다.


누군가의 기도가 닿는 자리에,
누군가의 위로가 흘러드는 틈에,
우리의 작은 존재도 피어날 수 있음을,
돌계단 풀은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기억해 주렴.
작은 자리라도, 꽃은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꽃은, 세상의 어떤 정원보다도 더 특별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삶이 주는 희망이자,
우리 모두가 피워야 할 꽃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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