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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모리

나 자신과의 이별

by 강석효

오후부터 봄비가 내렸다. 긴 겨울을 지나며 골목골목 쌓인 먼지를 말끔히 씻어내듯, 땅 밑에서 새순이 밀고 올라오듯, 그 비는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대지를 적셨다.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하늘이 조용히 흐느끼는 것만 같았다.


그날, 장례식장은 그 봄비 속에 잠겨 있었다. 차가운 바닥, 묵직한 공기, 그리고 빗소리. 아내와 함께 의사인 선생님과 함께 도착한 빈소는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찔렀다. 소리 없는 적막은 때때로 가장 큰 통곡보다 더 진한 슬픔을 품고 있는 법이다.


빈소 안,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는 울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묵묵히, 절차를 따르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 얼굴이 슬픔이 없는 얼굴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슬픔은 언제나 가장 늦게 온다. 장례가 끝나고, 문상객들이 돌아가고, 식탁 위 국그릇이 식고 나서야 비로소 그 슬픔은 조용히, 그리고 깊이 내려앉는다.


고인은 돌아가시던 그날 아침에도 정원에서 잡초를 뽑고, 가지를 다듬고 계셨다고 한다. 그 손길은 다정했고, 허리는 꼿꼿하며 단단했다. 누가 보더라도 내일도 그 정원을 손질하실 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그 어떤 약속도 기다리지 않고, 그 어떤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치 등을 돌리고 방을 나가는 소리 없는 뒷모습처럼.


식사 자리에서 서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죽음은 결국, 나 자신과의 이별이에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평생 살아온 자신과의 이별, 사랑했던 사람들, 가꿔온 정원, 읽던 책, 덮어둔 베개, 모두와 이별하는 순간.


그러니 갑작스러운 죽음은 자신에게 조차 그 이별을 준비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래서 더 아프다.


문상객들이 하나둘 떠나고 차려졌던 음식들이 걷히고 나면, 그곳엔 정적만이 남을 것이다.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진짜 슬픔은 시작된다. 그 슬픔은 말로 울지 않고, 눈물로도 다 빠져나가지 않으며, 단지 고요하게, 끝없이 가슴속을 적신다.


그날의 봄비는 왠지 차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비는 이별의 상처를 감싸주는 듯했다. 말없이 어깨를 다독이고, 문득문득 울컥해지는 마음을 천천히, 조용히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괜히 평소보다 더 자주 차창 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비에 젖은 가로수, 우산을 나란히 쓴 두 사람,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 모든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이란 사실이 왜 그렇게 마음을 붙들었는지.


살아 있다는 건, 하루를 마주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라 기적 같은 축복이라는 걸 우리는 이별을 통해서야 비로소 배우게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늘 하루. 특별한 계획도, 큰 감동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하루가 사실은 가장 소중한 하루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밥 한 끼.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농담에 깔깔 웃는 순간. 손등에 닿은 햇살, 바람에 살랑거리는 커튼.


그 모든 것이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더 따뜻하게 껴안을 수 있을까.


그러니 부디, 오늘의 햇살을 가볍게 여기지 말기를. 오늘의 안부 인사를 무심히 넘기지 말기를.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 살아낼 수 있다는 뜻이고, 살아낸다는 것은 누군가를 기억하고, 사랑하며, 나를 다정히 이별할 준비를 해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운다. 이별을 통해 지금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를 또 견딘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 인생이 주는 가장 큰 희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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