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부터 테트리스라는 게임을 좋아했다. 길쭉하고 네모난 블록이 차곡차곡 쌓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가지런하게 쌓여가는 블록의 모양이 기분이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많은 시간 연습이란 걸 했었다. 덕분에 엄마 생신 일주일 전, 인터넷에서 열렸던 작은 테트리스 대회에서 1등이라는 순위와 10만 원짜리 상품권을 타서 엄마에게 선물을 했던 적이 있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일을 하며 값진 선물을 할 수 있었던 그날의 행복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좋아서 테트리스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 더 연습했던 것처럼 살기 위해 스펙을 쌓아가는 요즘은 좋아하건, 싫어하건 더 잘하고 싶은 게 생길 때면 하고, 또 하는 연습이란 걸 하게 된다. 저마다 부족한 부분은 있지만 무던히 노력하여 극복해 나가며 살아가고 있다. 못했던 것도 연습과 노력을 통해 어느 순간 잘하게 되면 그건 당연히 잘해야 되는 게 맞았다. 모든지 잘해야 되는 사회 가운데 서있는 지금, 못하는 게 생길 수 없기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부족한 점수를 채우기 위해 매일 같이 영어 문장을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이유도 시험을 보기 위한 연습의 일부. 매일 다른 내용으로 성장배경을 쓰고 나를 꾸미는 자소서는 살기 위한 연습. 반복되는 연습 속에 지쳐만 가는 와중 뜻 밖에 보람은 찾아온다.
기대하지 않았던 토익점수가 덜컥 올라 닿을 거 같지 않았던 목표 점수에 닿았고, 끝없이 떨어지기만 했던 자소서가 붙어 면접을 보러 오라는 짧은 문자 메시지. 더 멀리 가야 되지만 일단 지금은 투자했던 시간의 보상을 받는 작은 행복을 누려볼 수 있다. 내가 바라던 행복은 멀리 있고, 당장 나를 웃게 해주는 행복은 가까이에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가 좋아서 더 하고 싶은 연습 대신 ‘못하니깐, 더 잘해야 되니깐’이라는 마음으로 해야 되는 연습이 많아졌다. 하면 할수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못하는 게 많았구나.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구나.
못할수록 우울했고, 반복할수록 잘하는 건 늘어나고 있지만 마음의 행복감은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하는 연습은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거뿐.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은 제자리에 있고, 관심 없던 일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의 무엇인가가 되어 있었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던 오늘, 못하는 것에 얽매여 연습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언제부터 못하는 것을 반복하는 일상이 행복해지는 연습이 되었을까? 좋아하던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던 무렵 즈음. 그 무렵 나의 행복의 기준이 높아진 것 같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건 어쩌면 나의 행복이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보이지 않아 지쳤을지도 모른다.
사실 행복이란, 생각하기 나름이다. 못하는 걸 도전해볼 기회가 있어 행복할 수도. 지금 여유 있게 책 한 권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 될 수도 있다. 지금껏 해오던 것처럼 연습으로 못하는 것도 잘하게 된다면 행복의 기준이 낮았을 때처럼 다시 한번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 의외로 행복은 행운을 찾기 위해 무심히 밟고 있는 세잎클로버처럼 가깝게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