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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선 Nov 24. 2020

추억과 그리움에 대하여

어머님의 첫 기일을 맞아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는 제사가 없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께서 둘째라서 명절이면 큰집에 가서 인사드리고 올뿐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 시댁도 제사가 없어서 작년까지 차례나 제사를 지내본 적이 없었다.


작년 추석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차례를 준비해야 했다. 요양병원에 계시던 아버님이 7월에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노환으로 2년 정도 입원해 계셨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남편은 여동생만 한 명 있었고 멀리 지방에 살고 있어서 남편과 나 둘이서 모든 장례절차를 해내야 했다. 추석 차례도 그랬다. 제기를 주문하고 병풍과 돗자리 등 준비할 것도 많아 정신없이 허둥댔던 것 같다. 인터넷을 찾아가며 지방을 쓰고 지역마다 다른 제사 풍습 때문에 헷갈렸지만 이쪽저쪽 물어가며 차례를 지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석 달 여가 지난 뒤 같은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어머님마저 돌아가셔서 또다시 우리에게 많은 슬픔과 충격을 안겨 주었었다. 오십 평생 차려 보지 않았던 제사를 작년 추석부터 명절 두 번과 아버님 기일, 올해 추석까지 벌써 4번을 지냈고  다음 주 어머님의 첫 기일이 또 다가온다.


지난 일요일, 어머님과 아버님을 함께 모신 부산 추모공원에 남편과 둘이서 다녀왔다. 차가 없으니 지하철을 타고 종점인 노포역까지 가서 37번 버스로 갈아타고 가야 했다. 환승이 되는 시내버스지만 배차 시간도 길고 한적한 시골 마을 정류장을 거쳐 가다 보니 마치 시외로 나들이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명절 앞이 아니니 참배객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도 많았다. 올 추석 때는 코로나 때문에 추모공원이 문을 열지 않아 찾아뵙지 못했다. 부모님 명패 앞에 서서 맘속으로 이런저런 말씀을 드려본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지난 추석에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벌써 일 년이나 지났다니 실감이 나질 않네요.

담주에 오실 때 두 분이 사이좋게 집에 잘 찾아오세요.


왈칵 그리움에 눈물이 났다.




결혼 초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는 어머님이 무서웠다. 대학교 선후배 사이인 남편과 졸업한 그 해에 결혼해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나는 마냥 모든 게 어렵기만 했다. 집안 살림은 물론 음식 솜씨도 좋으시고 매사워낙 정확하신 분이라 아마 속으로 내가 그리 탐탁지 않았으리라. 어머님은 젊은 시절 시집살이를 심하게 해서 며느리가 들어오면 절대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부족한 게 많아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항상 신경 써주고 아껴주셨다.


첫째가 태어난 해에 우리 부부는 전통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도매시장이라 남편은 새벽에 출근하여 장사를 하고 지방에 물건을 보내는 등 힘쓰는 일이 많았다. 처음부터 가게가 잘 되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노력으로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나 역시 아이가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진 못해도 나름 도우려고 노력을 했다.


두 살 터울인 둘째가 태어나고 가게도 점차 제 자리를 잡아 바빠지기 시작하자 삼칠일이 지난 둘째를 어머님 댁으로 데려가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키워주셨다. 당시 어머님 연세가 50대 초반,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였는데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것이다. 첫째는 우리 집에서 가까이 사시던 친정부모님이 7살까지 키워주셨다. 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두 아이를 키워주신 양쪽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과 육아에 치여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아이들을 데려와 학교에 입학시킨 후 가게 일과 집안일, 그때까지 해보지 않았던 아이들 케어까지 갑자기 하려니 너무 힘이 들었다. 어머님은 버거워하는 나를 위해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걸리는 거리를 매일 오셔서 방과 후에 아이들을 챙기고 반찬을 해놓고 집안일도 도와주셨다. 그렇게 몇 년을 바쁜 우리를 위해 와서 돌봐주셨고, 아이들이 커서 손이 덜 가게 되고 가게도 예전처럼 바쁘지 않아 이제는 집에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을 때는 본인이 힘드신 것보다 우리 장사가 덜 된다는 말에 더  걱정해 주셨다.




몇 년 후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머리가 자꾸 아프다는 어머님을 모시고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결과는 뇌종양인 것 같다며 병원에 가보라고 하였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드라마에서나 들어본 병인데 막상 우리의 일이 되니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입원을 하고 수술을 하기로 했다.


치료 과정은 세세히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수술과 입원 치료, 그 후  방사선 치료, 정기 검사 등 몇 년을 어머님과 함께 병원에 다녔고 다시 재발 후 재수술까지 같이 겪어가며 어머님과 나는 어느새 동지애 같은 걸 느꼈다.

결국 종양은 어머님을 계속 아프게 만들었고 점점 나빠져 가서 곁에 있는 우리도 마음 아프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도 많이 놀라고 무서웠을 것이다. 워낙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똑 부러지던 분이라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아버님이 노환으로 입원하신 후에도 혼자 집에서 지내려고 하셨다. 하지만 상태가 안 좋아져서 결국 우리 집으로 모셔와 요양병원에 가시기 전 몇 달을 함께 지냈고 아직도 그때의 추억이 우리 맘속에 남아 있다.


출처: pixabay. com


얼마 전 까지는 꿈에도 자주 나오시고 했었는데...

어머님의 첫 기일이 다가오니 함께 했던 추억들이 자꾸 떠오른다. 고마웠던 기억, 같이 작은 딸을 보러 기차 여행을 했던 기억, 부산역 앞 만두 맛집에 모시고 갔던 기억 등...

명절 때도 어머님 댁에 가면 음식도 다 해놓고 설거지도 안 시키고, 정말 잘해주셨고 예뻐해 주셨는데...

생각할수록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리운 어머님

어머님...  벌써 일 년이 지났네요.  

아침저녁으로 많이 추워졌고요. 그곳은 춥지는 않으시죠?

어머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제 아프지 말고 고생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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