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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선 Dec 17. 2020

절벽 위의 도시 론다를 만나다.

빠에야 먹으러 가서 공짜 소꼬리찜 먹은 썰


론다로 가는 길

말라가에서 론다까지 가는 두 시간 남짓의 버스 여행이 그렇게 힘들지는 몰랐다. 며칠 전에는 좁은 이코노미석을 타고 바르셀로나까지 12시간 비행도 했었고 그라나다에서 말라가 올 때 1시간 35분의 버스 이동도 그리 힘들않았다. 그래서 까짓 30분 정도 더 타는 것 정도야 싶었다.


딸은 멀미가 심한 편이라 출발 한 시간 전에 미리 한국에서 가져간 멀미약을 먹게 했다. 원래 차만 타면 자는 딸은 멀미약을 먹어서인지 출발한 지 5분도 채 안돼서 금세 잠이 들었다. 부러운 체질이다. 처음 한 시간은 낯선 창밖 풍경과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기대로 오히려 좋았다. 한국과 다른 낮은 산과 푸른 초원, 가는 도중 드문드문 나타나는 작은 마을들, 차창밖으로 보이는 모습에 설렘도 커져만 갔다.


안달루시아 (출처: pixabay.com)

그리 높지 않은, 산인지 언덕인지 모를 구릉들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 길을 따라 버스는 달려갔다. 산 허리를 타고 꼬불꼬불 돌아가는 길이 마치 우리네 아리랑 고개처럼 느껴졌다. 가다가 몇 가구 살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마을에 들르기도 하고 좀 큰 마을에선 10분가량 정차해 있기도 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시골 완행 버스 비슷한 것 같았다.


안달루시아 (출처: pixabay.com)

높은 협곡 위에 위치한 론다에 가까워질수록 길이 점점 험해지기 시작한다. 한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멀미도 나고 허리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목도 마르지만 화장실 가고 싶을까 봐 물 마시기도 저어되었다. 옆을 보니 흔들리는 차 엔진에 맞춰 목베개에 고개를 맡긴 채 정신없이 자고 있는 딸이 보인다. 부럽다. 나도 잠이라도 자면 나을까?


 눈을 감고 있으면 잠이 올까 싶었지만 더 말똥말똥 예민해 지기만 했다. 가이드북이라도 읽어볼까 했더니 눈도 침침하고 허리는 점점 더 아파와서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이제는 이국적이던 창밖 풍경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오기가 나고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협곡 위에 세워진 다리 하나 보려고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있을까? 막상 가보면 생각보다 영 별거 없는 것 아닐까? 별거 없기만 해 봐. 가만 안 둔다!

누군지도 모를 이에게 협박을 해가며 벼르기까지 했다. 드디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두 시간이 지나고 버스가 론다 버스터미널에 들어섰다. 누가 들었다면 적어도 대여섯 시간은 버스를 탄 줄 알겠다. 나중에 물어보니 가는 동안 내내 잤던 딸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ㅋㅋ




파라도르 데 론다 Parador de Ronda

론다의 중심 누에보 다리 바로 옆에 있는 숙소 파라도르는 헤밍웨이의 소설에도 나왔던 론다의 옛 시청 건물을 개조해 만든 호텔이다. 파라도르 바로 옆에는 헤밍웨이의 길론다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버스터미널에서부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걸어서 도착한 우리는  쉬고 싶다는 생각에 빨리 체크인을 하고 배정받은 객실로 들어갔다. 


파라도르 데 론다
파라도르 로비 모습

천천히 객실을 둘러보던 우리는 그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객실은 거짓말 조금 보태운동장만큼 넓었고, 스탠더드 룸보다  등급 위의 수페리어 룸의 전망은 듣던 대로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스탠더드룸은 누에보 다리 전망이 아닐 가망성이 높다고 한다.


넓은 수페리어룸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보니 사진으로만 보았던 누에보 다리와 그 아래의 까마득한 협곡이 바로 눈 앞에 펼쳐져 있고 창문 아래에서 누군가 연주하는 버스킹 음악 소리가 우리의 귀에 들려왔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환상적인 장면이 과연 실제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다.

정말 미친 풍경이다.


객실 발코니 전망
발코니에서 보이는 장면

론다 사진을 찾다가 딸이 찍어둔 동영상이 있어서 보았는데 또다시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Restaurante Las Maravillas

오는 내내 느꼈던 짜증은 어느새 사라지고 쉬기는커녕 빨리 누에보 다리를 보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미 오후 세시가 넘은 시간 늦은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Las Maravillas 입구 (출처: Google)

우리가 찾아 간 식당은 '짠내 투어'라는 TV 예능에서 소개된 적도 있는 맛집 Las Maravillas 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점심을 늦게 먹는 건지 오후 세시가 지난 시간에도 야외 테이블은 물론 실내까지 거의 가득 차있었다. 두 명이라고 하니 겨우 하나 남은 2인석에 안내해 주었다. 이 식당 맛집이긴 한가 보다.


론다에서 유명한 음식은 소꼬리찜인데 후기를 보니 이 곳은 소꼬리찜보다 빠에야가 맛있다고 한다. 직원에게 주문하니 빠에야는 적어도 30분에서 한 시간 걸린다며 괜찮겠냐고 물어보았다. 우리는 기다리기로 하고 그 사이에 간단히 먹을 타파스 몇 개와 맥주도 같이 주문했다. 생 버섯을 슬라이스 한 타파스와 매운 소스와 밥과 함께 나온 닭꼬치 타파스, 각각 1.5 유로(약 2,000원), 2.6 유로(약 3,500원)로 가격도 정말 싸다. 생맥주 두 잔을 함께 곁들이니 배도 부르지 않고 메인 음식을 먹기 전에 좋은 애피타이저가 된다. 간단히 술 한 잔 할 때는 타파스만 시켜도 충분할 것 같다.


닭꼬치 타파스 (2.6 유로)
버섯 타파스 (1.5 유로)

한 시간이 지나고 가게를 가득 채웠던 손님들도 빠져나가 가게 안이 제법 한산해졌다. 타파스와 맥주를 거의 다 먹고 난 뒤에도 빠에야는 나오지 않았고 좀 이상한 기분에 직원을 불러 물어보았다. 알아보겠다며 급히 갔다 온 직원은 아주 당황해하며 뭐라고 얘기했다.


통역 담당 딸에 의하면...

실수로 우리 주문이 누락되었다. 원한다면 다시 빠에야를 해주겠다. 미안하지만 또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 만약 다른 메뉴를 원하면 (예를 들어 소꼬리찜이라든지) 금방 나올 거다. 물론 무엇을 주문하든 그건 공짜로 해주겠다.

라는 뜻이었다.


론다의 명물 소꼬리찜

이제는 배가 고파져서 더 기다리긴 힘들다.  할 수 없이 소꼬리찜을 달라고 했다. 예상과 달리 소꼬리찜은 부드러운 육질에 약간 짭조름하면서, 한국의 갈비찜보다 연한 맛을 내긴 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맛이 있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공짜라서 그런 건지... ㅎㅎ 


실수는 했지만 정중히 사과하고 음식값도 받지 않아서인지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타파스와 맥주값 10.5 유로만 지불하고 나왔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타파스에 맥주나 와인 한 잔 하러 와도 좋을 듯하다. 




누에보 다리 Puente Nuevo

누에보 다리 (출처: pixabay.com)

론다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120m 깊이의 타호(El Tajo) 협곡 위에 지어진 다리. 새로운 다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지어진 지 200년이 넘는 아주 오래된 다리이다. 1735년 협곡을 사이에 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기 위해 짓기 시작했는데 8개월 만에 완공한 다리가 무너져 90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다시 42년의 공사 끝에 지금의 다리가 건설되었다. 다리의 중간에 있는 방은 예전에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슬픈 역사가 서린 곳, 누에보 다리이다.


누에보 다리에서 내려다본 풍경


누에보 다리를 가장 잘 보기 위해서는 구시가지 쪽으로 건너가 산책로를 통해 뷰포인트로 가야 한다. 가이드북이나 블로그에 알려져 있는 전망 포인트로 가는 길은 공사로 막혀 있었다. 할 수 없이 구시가지를 가로질러 외곽으로 둘러서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남부 스페인 지역처럼 아랍풍의 흰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구시가지 거리가 어쩐지 정감이 간다. 코너를 도니 마을이 끝나고 트레킹 하기에 딱 좋을만한 길이 나타났다. 마치 봄이 온 듯 날씨는 따뜻하고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 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폴짝폴짝 신이 났다. 길 가에 핀 노오란 유채꽃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자유로이 풀을 뜯는 말을 보며 사진을 찍어 보기도 한다. 평화로운 오후의 산책길이다.



한참을 쉬엄쉬엄 걷다 보니 어느새 절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높이 세워져 있는 다리의 모습도 눈이 들어온다. 뷰포인트에 도착해 누에보 다리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몇몇 여행객들이 누에보 사진을 찍으려고 와 있었다. 우리도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해 언덕을 올라갔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론다는 마치 천공의 도시처럼 보였다. 새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푸르른 하늘 아래 견고히 서 있는 석조 다리 주위로 하얀 집들이 올라앉아 서로 조화를 이루며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 힘이 얼마나 끈질기길래 저 깊은 협곡에 저런 구조물을 세울 수 있었을까! 인간이 지은 건축물을 보면서 왠지 대자연을 마주한 듯 경외감이 느껴진다. 도저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 나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 겨우 두 시간 힘들었다고 불평했던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감동에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아! 여기에 오길 잘했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영감을 받고 사랑했던 도시 론다,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다룬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배경이라고 한다. 파라도르 옆에 있는 헤밍웨이의 길에 가보았는데 그냥 작은 규모의 공원처럼 되어 있었다.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전망대가 나와서 절벽 아래 펼쳐진 들판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헤밍웨이의 길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협곡 풍경


전망대와 헤밍웨이의 길을 돌아보고 간단히 저녁도 먹고 객실로 돌아오니 발코니 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하나 둘 조명이 켜지기 시작하며 밤이 깃들고 있는 론다는 우리에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다. 낮에는 제법 많이 보였던 여행객들은 대부분 당일치기 여행이었는지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금세 인적이 사라지고 한적해졌다.



누에보 다리의 야경을 더 잘 보려고 침대 옆에 있는 협탁을 굳이 질질 끌고 발코니 옆에 갖다 놓았다. 은은하게 비치는 누에보 다리의 야경을 보며 마시는 맥주 한 잔의 맛이 정말 끝내준다. 야경이 맥주 맛을 더해주는지 맥주가 야경을 더 아름답게 느끼게 해 주는지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무슨 문제가 있을까...


발코니에서 보는 론다의 야경

론다는 주로 세비야에서 당일치기로 오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도 1박을 할지 오기 전까지 고민이 많았었다. 사실은 파라도르에 숙박해 보고 싶어서였는데 이 풍경을 보는 순간 1박을 하기로 한 나를 칭찬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없지만 다음날 새벽 산책길에 보았던 안개에 싸인 협곡과 누에보 다리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환상적이었다. 밤을 보내고 새벽에 나가야만 볼 수 있는 선물 같은 멋진 풍경이다. 론다에서는 적어도 하루 이상은 머물러야 한다. 가능하면 며칠 머물러도 더 좋을 테고...


오는 동안 힘들었다며?

다시 올 생각이 있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당연하지! 이렇게 멋진 곳인데...

입석으로, 서서 오더라도 와야지! 말하고 싶다.

사실 다음엔 멀미약을 먹을지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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