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서 간을 봤다. 깨어나 어디론가 가도록 하는 아침을 거스르지 못하는 사람들과 동행인이 된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적 질서를 깰 용기가 없어 그런지 아니면 생존하기 위한 전략에서 나온 행동인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없다. 다만 몸과 마음이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여 문 앞에 와있는 것은 분명했다. 문 안에는 럭비공 같은 주관적 질서가 샌님 같은 객관적 질서를 깬다는 위협적인 소문의 진원지가 있다. 디딘 발길이 덫에 걸려 행방을 상실한 덤불 속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발을 저리게 했다. 문 앞에 와있다는 인식보다는 끌려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있는 검붉은 틀과 파란 유리로 육중하게 위엄을 발하고 있는 바깥문 입구에서 들어갈까 말까를 망설였다. 무성한 부정적인 소문으로 생긴 불안감으로 저린 발과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문 앞에 오면서 포기를 했고, 약속을 어기는 것은 더더욱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오로지 옮기는데 망설이는 발을 탓할 뿐이다. 약간의 망설임은 약간의 용기를 주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죄를 짓는 일로 불려 온 것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믿고 과감하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하얀 벽에 둘러싸여 야릇하게 앞이 터진 미니스커트처럼 정갈하면서도 미혹적으로 조성된 비서실은 시선의 왼쪽에 있어 훔쳐 보듯 사팔눈으로 보는 것이 편했다. 아늑하고도 포근하게 맞이했지만 아무도 없어 돌연 삭막한 정적이 조용하게 흘렀다. 매우 깨끗하고 아담하게 디자인된 노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여비서가 앉아야 어울렸다. 주인 없이 뒤로 밀린 채 덩그란히 혼자가 된 의자는 ‘급한 용무로 비웠으니 잠시 기다려 달라’는 무언을 암시하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고만 있으라는 것인지 앉아서는 안된다는 것인지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누군가를 향해 묻거나 인사할 필요가 없는 이 공간에서도 애당초 생긴 가늠되지 않는 무게에 눌린 마음을 다잡는데 약 5분 정도, 방문객들이 앉을 수 있도록 붙박이 운명을 가진 고독한 의자를 노려보다 앉는데 3분 정도 흘렀다. 주인처럼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점점 땅속으로 꺼져가는 묵직한 침묵이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고 시계는 똑딱똑딱 소리로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정적을 깨는 소리는 시간이 흘러간다는 아우성이었고, 사라진 사람이 나타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둥근 얼굴 속에서 정해진 길을 푸념 없이 무지하게 돌아가는 초침과, 초침의 바쁜 형상이 안타까운 듯 눈치를 보며 살찐 몸짓으로 속도를 조절하는 분침과, 미동을 감각하는 촉마저 멈추게 하는 굼벵이보다 느린 걸음으로 누워가는 시침이, 사이좋게 중함을 경쟁하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행했다. 그러면서 적어도 내려앉은 이 공간의 침묵을 깨고, 상상의 시간을 멈추게 할 시간은 정확하게 맞출 것이라는 공공연한 언약을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면 아군이 되는 침묵을 더 길게 이어가고 싶다는 인색한 욕심을 부리는 순간, 안쪽 집무실 문이 열리면서 모든 상상을 멈추게 하고, 20 여분 간의 공백을 채우듯이 앙칼지게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앞에 선 반비서는 눈이 마주치자 압도하는 신체와 빛나는 얼굴로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벌써 오셨어요?”라고 상냥하게 콧소리로 내며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면서도 힐끔 눈알을 굴려 전신을 단번에 스캔했다. 그녀는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는 듯이 긴 팔과 가냘픈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에 시달린 시야가 일시 정지상태가 됐다.
머리칼은 정확하기 5대 5로 갈라 뒤로 묶어 놓았고, 머리카락하나 휘날리지 않았다. 이마는 언덕을 오르듯이 곧게 솟아있었고, 눈썹은 초승달처럼 누워 눈을 가늘고 포근하게 감쌌으며, 눈은 맑은 호수의 물결처럼 살랑거렸고, 콧날은 급한 비탈길을 연상하듯이 시원하게 내려 뻗은 낭떠러지 계곡이었고, 입술은 서리 맞은 늦가을의 단풍잎이었다. 이목구비는 사계의 백미를 빼다 박은 듯이 공손하게 옹기종기 어우러져 있었다. 거기에다 날렵하게 디자인된 노란 투피스를 입었다. 상의는 몸의 굴곡에 딱 달라 붙여 라인을 그려 허리에 정확하게 멈췄으며, 치마는 과감하게 가운데 사타구니까지 갈라 허리에서 발목까지 길게 늘어트렸다. 그리고 이 모든 아름다움을 하얀 하이힐이 목숨 걸고 바쳤다. 그 수려한 생김새와 맛깔스러운 패션을 즐기는 주인이 반비서 자신을 제외하고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살아 움직이는 바비인형처럼 휘날리는 몸짓으로 옆걸음 치며 하얀 벽지로 되어 있는 통로를 따라 사뿐하게 걸어갔다. 공간을 가르는 휘날림은 따라오라는 묵언의 명령어가 되어 날아들었다. 그 상황에서는 따라가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따라가도 되는가 하는 의문부호는 의미가 없었다. 앞에서 깔끔하고 단정하면서도 곧게 행진하는 가느다란 몸매와 매우 찰지게 춤추는 각선미는 무의식으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나온 집무실 문을 열려는 순간 앙증맞은 뒤태에서는 노란 투피스 허리춤 사이로 살짝 엉클어진 하얀 블라우스가 밖으로 나와 눈의 초점을 빨아들였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아방궁 같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듯 짙고 붉은 너울춤을 추는 벽지가 황홀하고 깊숙하게 숨어있는 감정을 건드렸다. 창문 앞에는 언제부터인가 사육되고 있는 다둥이 난초들이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서 말없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소곤소곤 댔고, 주인처럼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양쪽으로 길게 놓인 노란 의자가 다양한 굴곡사연을 담고 있는 듯 얼룩져있었다. 그 가운데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황금빛 의자는 객과 주인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였고, 붉은 벽과 호영호제하고 있는 듯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눈에 들어온 황금빛 의자는 앉는다는 기능을 초월한 의자였다. 권력과 부를 갖고 전권을 휘두르는 왕이 앉는 용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차라리 어울렸다. 양옆에 붙어있는 팔걸이는 주인을 오랫동안 섬길 지위에 있는 노련한 시종처럼 밀착되어 있었다. 주인의 말뿐 아니라 숨소리조차도 놓치지 않겠다는 매우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자세였다. 얼굴과 어깨와 머리, 허리를 감싸고 있는 등받이는 목숨 걸고 주인을 지키려는 엄격함을 갖고, 진퇴양난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단호하고, 충성하다가 붉어진 눈을 가진 호위병이었다.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 서 있는 호위병의 눈빛은 익어가는 가을 들판이 벌이는 노란 칼무였다. 황금색 의자는 빈틈이 없이 권력과 힘을 가진 집무실 공간과 주인을 빛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온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땅바닥에 앉아 평온한 세상을 간절하게 바라는 달라이 라마와 같은 평온함과 바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에게 강하게 한 몸처럼 밀착된 모습은 아무도 앉을 수 없다는 암시였고,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성의 자세였으며,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다는 결기였고, 자신감의 발로였다. 공간을 음미하는 동안 이윽고 의자의 주인은 막 먹잇감을 앞에 둔 표범의 다리를 닮은 듯 날렵한 손으로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침묵을 묵사발내고 위계서열을 세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앉으세요”
“예, 감사합니다.”
이윽고 반비서는 다가오면서 “몸에 좋은 일본차입니다.”라고 소프라노 목소리를 공중에 날려 무겁게 누르고 있는 이곳의 중력을 뚫어버렸다. 악보에 맞춰 리듬을 타듯이 변칙적으로 도발하는 몸짓은 가뭄의 단비처럼 메말라가는 시선을 축축하게 적셨다. 수수하면서도 정갈한 자신의 노란 의자를 닮은 반비서의 패기 넘치는 언행은 이 공간의 또 다른 작은 주인임을 암시하는 듯했고, 자신감을 높여주며, 알 수 없는 여분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노란 색깔을 한 차를 마시려는 순간 반비서의 노란 옷과 함께 사연을 담은 듯한 구겨진 하얀 블라우스가 떠올랐다. 잠시 마시지 못하고 망설이는 틈새로 날카로운 눈빛이 날아왔다. 그러나 무슨 일 때문에 소환되었는지 캄캄한 상황을 밝혀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채 금방 사라졌다. 눈물을 흘리거나 기분이 처지는 질책성의 눈빛이 아니라는 판단을 믿고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생긴 긍정적 믿음이 날을 곤두세웠다.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황금의자의 주인은 여전히 가죽을 벗겨 숨어있는 살집이라도 찾아내려는 하이에나의 눈빛처럼 날카롭게 서류를 뒤졌다.
날아들었다가 사라진 눈빛과 그 눈빛에 대한 해석에 몰두하고 있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슬라이스 구질의 골프공 낙하점을 보는 듯한 초조함에 기대고 있다. 떠가는 공처럼 땅에 떨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아니 조만간 임계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명백한 불안감은 뱃속에서 생성되는 소화불량성 가스처럼 차곡차곡 쌓여 팽창하고 있었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과 부풀어버린 공간을 잡아먹는 동물이 있다면, 흔적 없이 삼키게 하고 싶은 충동과 기다림이 교차했다. 돌연히 쇳소리가 들렸다.
“일본차를 좋아해요? 드세요.”
“네”
“에또... 명문대를 나왔고, 성실하니 그만하면 됐고”
“.......”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 글쎄요.”
“본인의 장점 말이오?”
“예, 별로 없지만 인내하는 것이랄까요?”
“그렇습니까? 선생이 가지고 있는 인내는 어떤 것이죠?”
“도약하기 위해 움츠린 개구리의 뒷다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움츠린 개구리 뒷다리라, 나에게 인내는 이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려는 의지입니다. 다음 주부터 옆방에 빈 의자가 있으니 그리로 출근하세요.”
“네? ”
“나가보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거대하고 화려한 황금빛 의자가 소소한 희망을 한꺼번에 삼켜 버렸다는 것과, 동시에 문 앞에서 본 간의 실체는 빈 의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사나운 호랑이 앞에서 사지를 떨며 신음소리를 입속에 가득 머금고 있는 사슴 꼴이었다. 붉은 벽지는 마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다 터진 핏덩어리처럼 몸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발길이 크게 지체되고 있다고 알리듯 시곗바늘은 큰 소리로 짤카닥짤카닥 길을 재촉했다. 공중부양하듯이 엉거주춤 헛발질을 섞어 집무실을 나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반비서는 벌어진 일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자신의 노란 의자에 앉아 유쾌하게 말을 했다.
“괜찮으세요?”
“예, 갑자기 현기증이...”
“네, 저도 가끔 집무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심한 현기증이 나요.”
“네?”
“히히히 그럼요. 비밀... 물 한 모금 마시세요. 자주 뵙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빈 의자는 어떤 색깔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의자인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말 한마디로 간단하게 채워졌다. 그러나 짓눌린 말을 던지기 위해서 그리고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을 잊고 싶어 미련 없이 돌아서려 했지만, 손에 넣을 듯했던 황금을 눈앞에서 놓쳐버리고 빈손으로 도망치는 얼빠진 도둑놈처럼 뒤를 돌아보며 나왔다. 모퉁이에 서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 방에서 들었던 말을 잘게 잘게 썰어 날렸다. 그러나 되새김질해도 씹히지 않는 ‘빈 의자가 있으니 그리로 출근하세요.’라는 말이 사정없이 거칠게 엄습해 왔다.
이승에서 만날 수 없이 넓은 가슴팍을 가진 여인에게 달려들어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을 파묻히고 싶었다. 문밖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왜 이 시기에 그런 결정이...”라고 한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그 말을 정리하거나 떨치는 것은, 오히려 아무 관련성이나 인연이 없는, 생판 모르는 여인에게 사랑을 해달라는 것이 더욱 용이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밤하늘의 찬란한 별빛이나 여왕처럼 도도한 달빛이 흐드러지게 비춰도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 같은 그런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쌓은 실력이나 내공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때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헤맸던 시절, 일본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이 무산되어 좋았다는 그때의 기쁨이, 그대로 갔어야 했다는 지금의 후회를 더욱 빛나게 했다. 세상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붕괴와 확실하게 되돌리고 싶은 후회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떨어지는 명령에 따르고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아슬아슬한 사선 위에서 곡예하는 곡예사의 연기였다. 곡예를 하기 전에 차라리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충격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자승자박의 음모론이 고개를 들었다.
“소유자로서 목숨을 쥐고 있어, 즉석에서 파격적으로 결정하는 모습과 자신감이 충만한 결정에는 불만이 있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어차피 만나거나 피할 수 없는 호랑이라면 굴속에 들어가 만나보는 것이 어떻지. 뭐,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지금은 우연히 나에게 왔을 뿐, 새로운 우연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가게 될터, 그때까지만... 호랑이를 잡으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들고 호랑이를 달래면 되지 않을까?”라고 스스로 실현가능성이 제로인 희망을 속삭였다.
타인이 자아 속에 헤집고 들어와 자리를 틀고 마음대로 춤추게 하는 지휘자의 무도회를 중단시킬 힘은 없었다. 장점이라고 강하게 내뱉은 인내심만은 포기하지 말자는 결기를 하면서, 이유를 묻지 말고, 토를 달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형 인간이 되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이고 그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오로지 타인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뒷다리에 힘을 축적했다가 필요하면 널뛰기를 하는 방법 이외는 없었다. 연속적인 행위는 습관화되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이 생기고 있었다.
연구실에 돌아와 이제 떠나야 하는 운명에 놓인 볼품없던 작은 의자를 물끄러미 봤다. 지금까지 본인에게 알맞게 주어진 일들에 몰두하도록 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평범함을 누리게 한 보통신분의 친절한 친구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상생활을 중시한다는 듯 장식도 없었고, 열심히 일터로 향하는 범부가 앉기에 딱 맞는 의자였다. 팔거리는 지나가는 행인이 도움을 청하면 내어줄 것 같은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다. 평범함을 유지하고 있는 뒷모습은 위협이나 위엄도 없었고, 법이나 도덕이 없어도 질서를 따르는 순한 존재였고, 수수하고 편안하게 묵묵히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한 친절한 안내인이었다. 이 볼품없는 작은 의자가 소박한 일상을 만끽하게 하면서 심하게 구겨졌던 웃음을 만든 아름다운 행복제조기였고, 걸리작거림이 없는 자유를 누리게 한 것이 과분한 사치였다는 것도 알았다.
신분이 다른 빈 의자에 앉게 된 이유를 생각하자 ‘명문대, 성실, 일본차, 인내’ 등이라는 단어들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가슴팍에 깊게 박혀 따라야 한다는 근거가 된 것은 ‘인내는 이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려는 의지, 옆방에 빈 의자가 있으니 그리로 출근하세요’라는 문구였다. 왜 그 의자에 앉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어디에도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이치나 이해 가능한 근거와 논리는 찾지 못했다. 더욱이 인사이동을 하는 데 있어서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오로지 일방적인 명령과 순종만이 작동한 것 같았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투박하고 경직된 힘의 질서만이 홀로 도도하게 움직였다.
확실한 것은 거대하고 화려한 황금빛 의자 옆 방에 신분이 다른 빈 의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분이 다른 빈 의자에는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려진 바도 없었고 오로지 떠도는 소문만이 있었다. 비밀과 소문이 없는 속이 빈 의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적어도 앉아야 한다는 사실과 낭만적인 목마 의자가 아님은 분명했다. 마음속의 두근거림은 오염된 물거품처럼 산만하고 불경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약육강식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대충 가늠질이 됐고, 물거품을 난무하게 터트리면서 느끼는 공허한 맛을 보게 될 것이라는 순도 백 퍼센트의 추측도 가능했다. 빈 의자의 속성과 운명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채 그렇게 미래의 주인에게 난도질당했다.
지금까지 앉아 있던 작은 의자에 기댔다. 말은 뱉어야 의미가 전달되고, 귀는 들어야 이해를 하고, 눈은 보이는 것을 봐야 한다는 극히 단순한 보통의 진리가 점점 희석화됐다. 작은 의자가 자신에게 해온 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기다리는 빈 의자를 상상하면서, 입과 귀와 눈의 기능에 재갈을 물려 작동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특수한 논리가 생존 미학으로 발돋음했다. 그런 비관론에 싸여버렸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새로운 의자가 생긴 것일 뿐, ‘문 앞에서 간을 본’ 소문의 실체는 아직 밝혀진 내용이나 증명된 사실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앉지도 않은 빈 의자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집무실의 ‘양쪽으로 길게 놓인 노란 의자의 얼룩’을 닮은 듯 알 수 없는 색으로 물들여졌다.